[현장의 시각] 의사과학자, 한국만의 길을 찾아라

김명지 기자 2024. 7. 1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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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지 기자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강북삼성병원이 교수와 직원을 대상으로 의료 인공지능(AI) 강의를 열었다. 의료기기 업체인 딥노이드의 최현석 최고의료책임자(CMO) 상무가 연단에 올랐다. 최 상무는 2017년 서울성모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로 딥노이도의 뇌동맥류 AI 진단 소프트웨어의 임상시험에 참여했다가, 올해 아예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병원의 임상 현장과 AI 기술을 결합하면 재미있는 것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최 상무의 영입은 삼성전자 연구원 출신인 딥노이드 최우식 대표의 러브콜이 주효했다. 연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최 대표는 2015년부터 의료 AI 개발에 뛰어들었다. 의료 영상 기술이 발전하는데 판독할 영상의학과 의사가 부족하다는 점에 착안했다. 아이디어도 맞고, 제품도 잘 만들어냈는데 의료 시장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최 대표는 최현석 상무가 합류한 후 의료 AI의 길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최 상무가 강북삼성병원에서 한 ‘의료계 눈높이 강연’에는 참석자들의 호평이 쏟아졌다고 한다.

최근 의료기기 기업들이 딥노이드처럼 의사를 영입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웨어러블 심전도 기기를 개발하는 메쥬는 최근 고려대의대 김영훈 명예교수를 CMO로 영입했다. 고려대 안암병원 심혈관센터장을 지낸 김 교수는 부정맥 분야의 권위자로 통한다. 메쥬는 연세대 공대 출신의 의공학 박사인 박정환 대표가 후배 3명과 창업한 의료기기 벤처 회사다.

의료기기 분야에서는 의사를 영입해 크게 성공한 사례가 이미 있다. 사모펀드인 한앤컴퍼니가 1조원을 들여 인수한 루트로닉이 대표적이다. 미용 의료기기 1위 업체인 루트로닉은 중국 의사 출신인 이경매 임상개발팀 상무가 해외 영업을 주도한다. 루트로닉의 황해령 회장은 공학자이다. 한국공학한림원 바이오메디컬분과 정회원이자 동국대 의료기기 산업과 겸임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의대 교수가 의료기기 업체를 창업해 성공한 사례도 있다. 인하대 소화기내과 교수인 이돈행 넥스트바이오메디컬 대표는 수술용 카테터(얇은 관)로 뿌릴 수 있는 가루 형태의 지혈재 ‘넥스파우더’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지난 2022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았고,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 메드트로닉이 북미와 유럽에서 판매하고 있다. 이 대표는 미국 유타대 고분자공학과에서 연수를 받으며 알게 된 공학자들과 교류하며 제품을 개발했다.

결국 성공한 의료기기 업체는 진료 현장에 대한 이해가 높은 의사와 제품을 만들어 낼 기술을 잘 아는 엔지니어가 손을 맞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한 의대 증원과 맞물려 의사과학자 양성을 추진하고 있다. 의사과학자는 의사 면허를 갖되 환자 진료가 아니라 새로운 의료 기술, 신약, 첨단 의료 장비를 연구 개발하는 사람이다. 엔지니어와 손잡은 의사들은 의사과학자의 성공 표본으로 봐야 한다.

정부는 의사과학자 양성의 우수 사례로 하버드 의대 병원을 꼽는다. 하버드대 병원들은 의사 3000명 중 3분의 1이 의사과학자다. 미국은 의사와 과학자들이 격의 없이 만나 의견을 공유하고 협업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덕분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의사와 엔지니어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 5대 대학병원에 스카웃된 이공계 출신 교수가 의사 텃세에 이직하는 일도 많다.

포스텍과 카이스트(KAIST)는 공대가 의대를 신설해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하버드 의대나 성공한 한국 의료기기 업체처럼 의사와 과학자가 만나 협업하는 것이 바로 의사과학자를 배출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더욱이 최근에는 과학고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인재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들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엔지니어와 의사의 거리감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다.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한 과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와 동시에 필요한 것은 지금 있는 의사와 과학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이른바 작업복을 입는 엔지니어는 분명 이질감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이질감을 극복하면 충분히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임상 현장의 필요성을 반영한 엔지니어는 의료 기술 개발을 주도하고, 의사는 이를 통해 환자들에게 더 나은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 한국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의사과학자를 양성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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