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광야'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 광복 예견한 이육사 자신이었다" [책과 세상]

전혼잎 2024. 7. 18.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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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 저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
이육사 탄생 120주년, 순국 80주기 기념해
익숙하면서도 낯선 독립운동 행적 짚어내
1934년 6월 20일 서대문 형무소 수감 당시 이육사의 신원 카드. 이육사 문학관 제공

‘원삼이, 태경, 이원록, 이활….’ 우리가 모두 익히 아는 한 사람의 이름이다.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1904~1944)는 생전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첫 옥살이에서의 수인번호 ‘264(二六四)’에서 따온 이육사 역시 혁명을 꿈꾸는 의미를 담은 '戮(죽일 육) 史(역사 사)'에서부터 세상에 대한 냉소를 표현한 '肉(고기 육) 瀉(설사 사)', 또 가장 널리 알려진 '陸(육지 육) 史(역사 사)'까지 여러 변모를 거쳤다.

이육사는 ‘청포도’ ‘광야’ 등을 쓴 저항시인으로 익숙하지만 독립투사의 이력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역사학자인 김희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장이 쓴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는 그의 진정한 삶을 들여다보려는 책이다. 저항시를 쓴 시인이 아닌 자신의 시를 삶으로 실천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이육사다. 마침 올해는 이육사의 탄생 120주년이자 순국 80주기다. “올해는 이육사를 기리는 움직임이 좀 더 왕성했으면 좋겠고, 여기에 조약돌 하나라도 쌓는 일을 해야겠다”(김희곤 관장)는 의도다.


“이육사 독립운동 행적, 베일에 싸여”

이육사 시인이기 전에 독립투사·김희곤 지음·푸른역사 발행·328쪽·2만 원

저자는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이육사의) 문학작품은 잘못 기록될 가능성이 적다. 그런데 그의 교육과정이나 독립운동 행적은 베일에 싸여진 경우가 많아 마치 뜬구름 잡는 것만 같다”고 서두에서 밝혔다. 알려진 이육사의 독립운동 활동이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우선 이육사가 1927년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첫 옥살이를 했고, 이때의 경험에서 자신의 필명을 지었지만 정작 그와 형제들은 여기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다고 책은 밝혔다. 당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배달한 장진홍이라는 인물의 단서조차 잡지 못한 일본 경찰은 의거 장소이자 그의 고향인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이육사와 그의 형제들도 잡혀가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고, 1년 4개월 이후 장진홍이 잡히고 나서야 이들이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육사는 1931년 대구 지역에 일본을 배척하는 내용의 글을 누군가 뿌린 ‘대구 격문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또다시 옥살이를 했다. 이 역시 그가 모의했을 가능성보다는 당시 기자들이 언론을 통해 일제침략 통치에 항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외일보·조선일보에서 일한 기자인 그를 일단 잡아들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기자라는 직업을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길로 여겼던 이육사는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생의 절반을 '조국 해방' 위해 던졌다

이육사가 1941년 중국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친우들과 친척들에게 나눠 준 사진. 이육사 문학관

두 번째의 투옥 이듬해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만주로 간 이육사는 독립운동가 윤세주로부터 의열단 입단을 권유받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한다. 이후 이육사가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의 행로를 책은 꼼꼼히 훑는다. 이육사는 40년, 정확히는 이마저도 채우지 못한 39년 8개월이라는 짧은 생 중 20년을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데 바쳤다. 이 과정에서 17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가 한글 사용을 규제하자 한시를 쓰기도 했다. 다른 문인들이 변절할 때도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지켰다.

이번 책은 2010년 ‘이육사 평전’의 개정판이다. 지난 10년간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했다. 이육사가 1925년 중국 베이징대학이 아닌 베이징의 중궈대학에 다녔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베이징대학 재학설은 경북 안동민속박물관에 세워진 시비에 적혔을 정도로 통설로 받아들여지지만, 저자는 베이징대학에서 그의 자취를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1949년 문을 닫은 중궈대학의 존재를 확인하며 여기에 이육사가 재학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다.

또 이육사가 수필 ‘계절의 오행’에서 “모두가 내 집안이 대대로 지켜 온 이 땅에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 주었다”라고 썼듯, 그의 독립운동이 끈끈한 유대를 지닌 가족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점도 구체적으로 짚는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유명한 항일 운동가를 배출했고, 그 속에 자라난 육사와 형제들이 그러한 성향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1943년 베이징에서 무기를 반입해 들여오려던 이육사는 같은 해 7월 어머니와 큰형의 첫 제사를 치르려 잠시 귀국했다가 경찰에 붙잡히면서 사망에 이르렀다.

시 ‘광야’에서 이육사는 노래한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고. 저자는 말한다. “초인은 해방된 민족을 의미한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그 초인은 바로 육사 자신이었다. 이미 광복된 날을 내다보며 미리 민족의 가슴에 노래를 불어넣은 그 자신이 곧 ‘백마 타고 온 초인’이었다는 말이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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