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하는 아빠 과학자]⑩ "다양한 유연근로제가 과학자 일과 가정 양립 도와"(끝)
<편집자 주> 육아휴직을 쓰는 아빠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계에서도 느는 추세지만 현장 경험과 연구 지속성이 과학자에게 중요한 만큼 자녀를 위해 연구를 멈추는 건 쉽지 않습니다. 연구의 꽃을 피워야 하는 시기인 30, 40대 아빠 과학자에게 육아휴직은 어려운 결정입니다. 하지만 과학기술계도 예외여서는 안됩니다. 장기적으로 일과 가정이 양립해야 인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동아사이언스는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과 함께 육아휴직, 단축근무 등 육아지원 제도를 활용하는 과학자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남성 과학자가 겪는 현실 육아, 필요한 육아지원 제도, 아빠가 되면서 달라진 삶과 일에 대한 태도 등을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생생히 들여다 봅니다.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육아'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합리적, 현실적인 방안을 함께 고민해 보기를 기대합니다.
"과학자의 연구는 연속성이 있어야 해요. 연구를 이끌던 과학자가 갑자기 연구를 잠시라도 멈추면 여러 문제가 생겨요. 연구비가 끊기고, 과학자와 함께 일하던 연구원에게 임금을 주지 못하고, 결국 그 연구는 아예 중단됩니다. 육아로 인해 남성, 여성 과학자 모두 연구를 멈추는 일이 없도록 다양한 형태의 육아친화제도가 필요합니다."
4일 서울 강남구 WISET 본사에서 만난 문애리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 이사장(덕성여대 약학대 교수)은 이같이 말했다. 경력단절 여성과학자 수를 줄이고 남성, 여성 모두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면 다양한 형태의 육아친화제도를 도입해 과학자들이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두 자녀가 있는 문 이사장은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에서 생화학 석박사과정을 밟던 중 만 27세에 첫째를 출산했다. 생화학 특성상 실험이 많아 임신부였을 때 연구가 녹록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연구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다.
"실험실에서 방사능 위험이 있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사용했어요. 뱃속 아기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무서웠어요. 납으로 이뤄진 무거운 납치마를 매고 늘 실험을 해야했어요. 출산 전날까지 실험실에 있었습니다. 골백번 연구를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그동안 공부한 것이 너무 아까웠어요. 출산하자마자 3주 뒤에 복귀했습니다."
문 이사장은 "당시 과학계에도 육아는 여성이 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한 분위기 때문에 저뿐 아니라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출산 이후에도 육아 부담으로 연구를 멈추곤 했다"면서 "'여성 과학자는 연구를 잘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동료보다 20배 더 열심히 연구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녀들을 주말에도 학회나 실험실에 데려가며 연구를 이어갔다.
문 이사장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육아에 참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하면 경력단절 여성 과학자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분위기는 남성과 여성의 임금격차를 줄어드는 긍정적인 효과를 창출한다.
"과학계에도 여성과 남성 임금 격차가 아직 커서 남성과 여성이 모두 과학자일 때 여성이 연구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남성의 육아 참여도를 높이면 임금 격차도 줄어들고 여성 과학자가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집니다." 문 이사장의 설명이다. 합계출산율이 2021년 기준 1.67명인 스웨덴은 아빠가 자녀 1명당 출산휴가를 90일 이상 의무적으로 써야한다.
남성 과학자의 육아 참여도를 올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 이사장은 "과학자가 연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의 육아친화제도가 뒷받침 돼야 한다"고 답했다. 과학자의 연구는 연속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최소 1년 이상 휴직을 보장하는 '육아휴직제도'가 확실한 답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문 이사장은 근무 시간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유연근무제'가 필요하다고 헀다.
"과학자는 다른 직종과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성 때문에 다른 인력으로 오래 대체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아요. 연구를 잠시라도 쉬면 아예 중단해야 하는 사례도 발생합니다. 그래서 과학자의 다양한 유연근무제가 보장돼야 합니다. 하루에 2~5시간만 연구할 수 있는 근무제도, 요일별로 근무를 나눠쓸 수 있는 근무제도 등 연구별, 과학자별, 연구소별 특성에 맞게 육아친화제도가 운영돼야 합니다. 많은 인력과 비용이 투자된 연구가 육아라는 이유로 중단되면 안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육아, 출산 등에는 피치못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WISET은 이같은 이유로 연구를 쉬어야 하는 여성 과학자를 위한 제도를 운영하고도 있다. WISET 브릿지 펀드가 대표적이다. 이 펀드는 출산·육아 사유로 연구기간을 연장한 연구책임자의 연구팀에 과제비를 지원해주는 펀드다. 최대 2년간 연간 3000만 원을 지원한다.
또 '과학기술분야 연구개발(R&D) 대체인력 활용 지원사업’이 있다. 이는 휴직, 단축 연구자의 대체인력 인건비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남녀 구분없이 신청 가능하며 WISET이 연간 2300만 원의 인건비를 최대 15개월간 지원한다.
또 만 8세 이하 자녀를 둔 육아기 연구자의 신규 대체인력을 채용할 경우 해당 인력의 인건비와 역량강화를 위한 전문 교육을 지원한다. 문 이사장은 "휴직에 들어가는 연구자의 공백을 채울 전문성 있는 대체 인력이 있다면 연구자도 연구에 대한 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충분히 육아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를 지원할 정책을 계속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과학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30대 전까지 많은 교육을 받습니다. 보통 30대부터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지만 이때 결혼, 임신, 출산 시기가 겹치는 경우가 많지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는데 바로 저출산의 원인입니다. 저출산을 줄이기 위해 경제적 지원 정책이 많이 제안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보다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도록 지원해주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의 경우 연구와 육아를 모두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가 가장 필요하겠습니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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