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작곡가 없는 공연은 없다” 도이치 심포니의 실험

임석규 기자 2024. 7. 1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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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내 모든 공연에서 연주 의무화”
남성 작품 편중 ‘불균형’ 바로잡기 나서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타악기 연주자 비비 바실레바. 도이치 심포니 누리집

‘여성 작곡가 없는 콘서트는 없다’(No concert without female composer.)

독일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지난해 내건 기치다. 독일에서 프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곡의 98%가 남성 작곡가 작품이란 통계 수치도 제시했다. 이 악단은 “이런 식으로 이어갈 수는 없다”며 “2023~2024년 시즌 모든 공연에서 12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여성 작곡가의 곡을 연주하겠다”고 발표했다.

도이치 심포니는 약속을 충실히 이행 중이다. 오는 9월6일엔 쿠바 태생 미국 여성 작곡가 타니아 레온(81)의 작품을 말러, 코플란드의 작품과 나란히 연주한다. 9월22일에도 러시아 태생 영국 여성 작곡가 엘레나 랭거(50)의 작품을 멘델스존, 버르톡의 곡들과 함께 들려준다. 지난 1월 진은숙(63)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연주하는 등 최근까지 제시 몽고메리(43), 릴리 불랑제(1893~1918),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 등 공연 때마다 여성의 작품을 편성했다. 1946년 창설된 이 악단은 로린 마젤과 리카르도 샤이 등 명 지휘자들이 거쳤고, 진은숙이 상주 작곡가로 활동했다.

영국 시민들이 여성 작곡가 연주를 늘리라고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주노 스노든

남성 작곡가 편중은 독일뿐만이 아니다. 미국 뉴욕의 비영리단체 ‘음악 속의 여성’(Women in music)이 31개국의 2021~2022년 공연을 조사했더니 여성 작품은 7.7%에 불과했다. 이 단체는 2018~2019년 세계 15개 주요 오케스트라의 프로그램을 조사했는데, 1445회의 공연에서 여성 작품이 포함된 공연은 76회(5.3%)에 그쳤다. 공연에서 연주된 3524곡 가운데 3442(97.7%)곡이 남성 작곡가 작품이었고, 여성 작곡가 작품은 82곡(2.3%)에 지나지 않았다.

공연 작품의 성비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은 영국에서 두드러진다. 비비시(BBC) 프롬스와 알데부르크 페스티벌 등 대표적 클래식 축제들이 현대곡을 위촉할 경우 절반은 여성 작곡가들에게 의뢰하고 있다. 영국 현대음악 장려 기구 ‘사운드 앤 뮤직’도 협업 작곡가의 절반을 여성으로 채운다. 영국 여성 작곡가 에밀리 홀은 “모든 공연 프로그램에 여성 작곡가 작품을 적어도 한 곡 이상 넣는 게 표준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서울시향은 2019년 러시아 투어에서 마르쿠스 슈텐츠 지휘로 작곡가 조은화(오른쪽 꽃다발 든 사람) 작곡가의 ‘장구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自然(자연), 스스로 그러하다’를 연주했다. 서울시향 제공

일부에선 여성 작곡가 할당제의 효용성에 대한 의구심도 제기된다. 무엇보다 여성이 쓴 작품 수가 남성의 작품보다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는 점을 문제로 꼽는다. 현대 이전엔 여성에겐 작곡가의 길이 사실상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작품은 짧은 소품 위주로 편성하는 등 구색 맞추기로 흐를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작곡가 진은숙은 도이치 심포니 사례를 다룬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작곡가의 성별이나 국적이 아니라 작품의 질이 유일한 기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성 작품 연주를 늘리려는 흐름은 차츰 확대되는 추세다. 특히 현대곡의 경우 여성 작곡가의 뛰어난 작품이 적지 않아 핑계를 대기 어렵게 됐다. 도이치 심포니는 다음 시즌엔 더욱 다양한 여성 작곡가 작품을 편성하겠다고 밝혔다. 음악칼럼니스트 노승림 숙명여대 교수는 “현대 작품 비중을 늘려 레퍼토리의 다양성을 확보하면 여성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할 기회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여성 작곡가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국립심포니는 오는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작곡가 전예은(39)에게 위촉한 ‘음악 유희’를 초연한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는 지난 4월 ‘선구자’란 주제의 공연을 19세기 여성 작곡가들의 작품들로 구성했다. 2022년 ‘힉 엣 눙크(Hic et Nunc) 페스티벌’은 레라 아우어바흐(51) 등 여성 작곡가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이 축제 예술감독을 맡았던 강경원 세종솔로이스츠 총감독은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다양성이 중요한 화두”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진은숙을 필두로 국내 여성 작곡가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서울시향도 2009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여성 최초로 우승한 조은화(51), 미국에서 활동 중인 홍성지(51)의 작품을 연주했다. 박선희 국립심포니 전 대표는 “여성 작곡가의 경우 청중에게 소개될 기회 자체가 부족해 공연장이 의도적으로 편성을 늘리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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