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7. 양평 구하우스미술관
훌륭한 예술작품은 사람들의 생각은 물론이고 삶의 태도까지 바꿔 준다. 다산 정약용을 길러낸 청계산과 두물머리에서 가까운 곳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술관이 있다. 북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양평군 서종면 무내미길에 자리한 구하우스미술관(관장 구정순)은 도시적 외관을 가졌으나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미술관 출입문에 인형처럼 귀여운 푸들 ‘융’을 소개하는 안내문과 지붕 위에 올라앉은 고양이 조각 사진이 붙어 있다. 2016년 7월 문을 연 구하우스미술관은 현재 ‘개관 8주년 기념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미술관 곳곳에서 관람객을 지켜보는 고양이 조각 여섯 마리를 찾아 사진을 찍어 7월 말까지 댓글로 올리면 8명을 추첨해 경품을 준다고 한다. 미술관에서 개와 고양이를 동시에 만나다니! 문득 한국인에게 사랑을 받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흥미로운 조언을 떠올린다. “신비한 영감을 원한다면 고양이를, 사랑을 원한다면 개를 키우라!”
■ 집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미술관
첫 번째 방부터 미술관의 통념을 통쾌하게 부순다. 사방이 붉은 작은 방은 아이들 방 같다. 아이들이 방바닥에 놓인 인형과 블록을 가지고 놀거나 오토바이와 세발자전거를 타 볼 수도 있다. 옷걸이로 사용하는 붉은색 상자는 포르투갈 출신의 조아나 바스콘셀로스의 설치작품이다. 사람인지 동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스타스키 브리네스의 우스꽝스러운 그림도 재미있다. 동심이 살아있는 그의 작품은 다른 방에서도 만날 수 있다. 카페 ‘융’에는 관람을 마친 듯 보이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고 어디에서 만날까 궁금했던 융이 카페에서 공을 굴리며 놀고 있다. 장식장에 전시된 소품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음 방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지개 터널처럼 연출한 직선의 복도를 지난다. 복도에 놓인 수십개의 의자도 물론 훌륭한 예술품이다. 미술 서적이 가득 꽂혀 있는 서재에서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안경을 낀 대머리 사나이는 20세기 건축 혁명을 일으킨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이다. 그에게 헌정한 이 조각은 프랑스 출신의 자비에 베이앙의 작품이다. 그 옆에 놓인 의자는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유일하게 집에 둔 가구로 알려진 조지 나카시마의 작품이다. 안내하던 정민찬 학예연구사가 유명 연예인들이 이 의자를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구하우스미술관의 상설 전시되는 작품 중 가장 주목되는 회화는 역시 데이비드 호크니의 ‘Pictures at an Exhibition’이다. 폭이 873㎝에 달하는 이 작품은 작가 호크니의 로스앤젤레스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작가와 관계 맺은 여러 인물의 모습을 총망라해 2018년 제작한 것이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함축해 등장하는 인물들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작가는 현재 80대 후반의 노인이지만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릴 만큼 생각이 젊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의자에 앉아 이 놀라운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도 각별하다.
■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현대 미술과의 유쾌한 만남
구하우스미술관은 계절의 변화에 맞춰 매년 3~4회의 기획전을 열고 있다. 5월1일부터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진실과 환상의 경계를 탐구하는 ‘유쾌한 Fake’전을 진행하고 있다. 8월25일까지 열리는 ‘유쾌한 페이크-반전과 위트의 미학’전을 둘러보며 현대미술 작가들의 기발한 상상력과 참신한 기법에 거듭 감탄한다. 김경환, 김기찬, 다니엘 피르망, 마크퀸, 모현서, 소피칼, 이태수, 이광호, 토니 마텔리, 푸크예 플레르 등 주목받는 작가들이 참여하는 특별전답게 관념의 틀을 부수는 신선한 작품과 마주한다. 서도호 작가의 ‘Gate-Small’은 한국 전통건축물의 문을 반투명의 비단 천으로 만들어 자유롭게 공간을 옮겨가며 전시할 수 있다. 피르망은 청바지를 입은 금발의 젊은 여성을 창조했다. 분홍색 옷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벽을 짚고 서 있는 여성의 불안한 뒷모습이 너무나 정교해 진짜 사람이 아닌지 관람객의 눈을 의심케 한다. 열서너 개의 붉은 사과를 주렁주렁 단 사과나무는 또 어떤가. 씨 킴의 조각 작품 ‘사과나무’ 아래 생쥐 한 마리가 숨어 있다. 차고 단단한 쇠로 한입 베어 물고 싶은 탐스러운 사과와 눈을 반짝이며 먹이를 찾는 쥐를 탄생시킨 작가의 손이 궁금하다.
호크니의 멋진 그림 옆에 왜 바위를 설치했을까? 푸른 정원이 훤히 비치는 커다란 창문을 배경으로 부석사 바위처럼 붕 떠 있는 커다란 바위가 놓여 있다. 이태수 작가의 ‘Stone Composition 006’이란 작품이다. 가까이서 아래를 보니 육중한 바위를 지탱하는 것은 얇은 유리판이다! “스티로폼과 포맥스로 실재 돌처럼 보이도록 극사실적으로 만들어진 조각 작품입니다.” 설명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한다. 반바지 차림의 후드티를 입은 여성 모자에 화살이 박혀 있다. 모현서 작가의 작품은 쇠에다 숨을 불어넣은 듯 부드러운 피부가 따스하게 느껴진다. 테이프가 붙어 있는 세 개의 종이가방도 철판으로 만든 조각이다! 너무나 정교해 말하지 않으면 조각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 함께 나눠요-예술품은 소유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
구하우스미술관 설립자는 한국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구정순 관장이다. ‘예술품은 소유가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진 구 관장의 그림 사랑은 20대 젊은 날에 시작된다. 다니던 MBC 계열 광고회사가 마침 인사동에 있어 구 관장은 점심시간이면 주변에 있는 갤러리를 둘러보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어느 날 점심식사 후 전시장에 들렀다가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1914~1965)의 그림 한 점을 사면서 미술과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
국내 유명 기업의 CI를 진행하며 업계의 주목을 받던 구 관장은 33세 젊은 나이에 미국 회사 디자인포커스의 한국지사장이 돼 KBS와 KB국민은행, 쌍용, 카스 같은 국내 기업의 CI를 제작해 명성과 경제적 여유를 누리게 된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았던 사회사업을 시작한다. 교육기관을 마음에 두기도 했으나 미술관 설립으로 방향을 정한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갤러리를 찾고 마음에 드는 작품을 수집한다.
국내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명한 작가보다는 창의성을 갖고 새로운 작품을 실험하는 작가를 더 주목한다. 이런 기준에 따라 권대훈, 서도호, 데이비드 호크니, 구사마 야요이, 펠리스 바리니, 토비아스 레베스거, 데미언 허스트, 다니엘 뷔렌, 막스 에른스트 등 20세기 미술사에 거론된 작가부터 현존하는 작가의 작품을 수집한다.
한편 구 관장은 소장 작품을 건물 안에 설치하면서 공간과 작품이 어울리는 방식을 깊이 궁리하다가 ‘집 같은 미술관’을 구상한다. 이러한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건축상을 받은 조민석 건축가에게 미술관 설계를 맡겨 마침내 ‘집 같은 미술관’을 완성한다. “구하우스미술관은 하나이면서 여러 가지인 공간으로 표현됐지요. 외부는 직선과 곡선, 내부는 직각과 예각, 둔각의 코너와 오목하거나 볼록한 공간들을 만들어 내 상자형의 전시 공간들 속에서 다양한 공간 경험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짐작하듯이 ‘구하우스’라는 독특한 이름은 설립자인 구정순 관장의 성과, 집을 뜻하는 영어 ‘하우스’(house)를 조합해 만든 것이다. ‘집 같은 미술관’을 표방하는 구하우스미술관은 이름에 걸맞게 예술과 디자인이 주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2층 전시실까지 관람한 후 라운지를 통해 밖으로 나서니 사방이 온통 초록빛이다. 야생화가 가득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조각 작품을 감상하다가 문득 올려다본 별관 지붕에서 고양이 조각을 발견한다. 구하우스미술관이 자리한 양평군 서종면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어울린 ‘황순원문학촌소나기마을’과 한국문학 및 세계문학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잔아박물관이 이웃하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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