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 조정석 열연은 고공비행, 웃음의 세기는 저공비행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코미디는 어렵다. 특히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순도 높은 웃음을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파일럿'은 스타 파일럿에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한정우(조정석)가 삶의 막다른 길에서 여자로 변신하는 파격으로 재취업에 성공하는 이야기를 다룬 코미디. 설명만 봐도 코미디뿐 아니라 감동과 사회고발적 메시지가 어느 정도 깃들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문제는 웃음과 감동, 메시지 모두에서 내내 시원스레 뻗지 못한다는 거다. 비행으로 따지면 내내 저공비행하는 느낌?
'파일럿'은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유퀴즈)에 출연한 한국항공 한정우 기장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에,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비행 실력, 넘치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성공의 지표로도 여겨지는 '유퀴즈'에 출연할 만큼 스타 파일럿이었으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한순간. 성희롱 발언으로 회식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상사를 달래고 분위기를 띄우고자 여성 승무원들을 '꽃다발'이라 표현하며 상사에게 술을 따르라 회유하는 장면의 녹음파일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잘리고, 항공사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설상가상 평소 무심하게 대했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고, 양육비를 비롯 각종 대출 상환이 빗발친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한정우는 술김에 저질러 버린다. 여성 조종사를 우선으로 뽑는 한에어에 여동생(한선화)의 이름을 빌려 한정미라는 여성으로 응시해 버린 것(여러분, 술이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덜컥 뽑힌 한정우는 뷰티 크리에이터인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여자인 듯 여자 아닌 여자 같은 모습의 여성 조종사 한정미로 재탄생한다. 아무리 그래도 건장한 남성이 특수분장도 아니고 메이크오버 정도로 여성으로 둔갑하는 게 가능하냐, 전 국민의 관심을 받던 이가 가족도 몰라볼 만큼 변신해서 제2의 관심을 받는 게 가능하냐는 개연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접어두자. 문제는 개연성이 아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성별을 바꾼 주인공이 그로 인해 웃음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 차별과 편견을 인식하고 반성하거나 성장한다는 설정은 여러 작품에서 익히 보아왔던 것. 더스틴 호프먼이 열연했던 '투씨'나 로빈 윌리엄스가 할머니로 분했던 '미세스 다웃파이어'도 있고, '파일럿'이 리메이크한 스웨덴 영화 '콕핏'도 있다. 성별은 물론 인종까지 뒤바꿔 코믹한 풍자를 보였던 '화이트 칙스'가 생각날 수도 있다. 익숙한 설정인 만큼 대중의 공감을 쉬이 살 수 있다는 건 분명한 장점이다. '파일럿' 또한 앞선 '젠더 체인지' 영화들처럼 성별이 뒤바뀌며 벌어지는 소동과 바뀐 성별로 인해 달라진 상황에 대한 묘사를 그리며 웃음과 공감을 유도하려 든다.
그러나 웃기긴 한데, 예상 가능한 웃음이란 점이 아쉽다. 여장을 하고도 무의식적으로 '쩍벌'을 하는 모습이나 저녁이면 거뭇거뭇해지는 수염 등 일차원적인 웃음이 그렇다. 같은 여성 조종사로 연대감을 쌓는 윤슬기(이주명)와 '썸'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동이나 '술꾼도시여자들'과 '놀아주는 여자'의 이미지를 한데 섞은 듯한 여동생 한정미와의 '티키타카', 공군사관학교 선배인 한정우를 깍듯하게 대하다 여성 조종사 한정미에겐 느물거리는 '플러팅'으로만 대하는 조종사 서현석(신승호)과의 관계 등에서 빚어지는 웃음도 소소히 터지긴 하지만 익숙한 것들이다. 어쩌면 그 터지는 웃음마저도 조정석을 위시로 한 배우들의 찰떡 같은 소화력 때문 아닌가 싶을 만큼 웃음의 순도가 그리 높진 않다.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주인공이 여성이 되어 겪는 차별과 편견을 묘사한 장면이나 그에 담고자 하는 메시지도 정직하다 못해 일차원적인 느낌이 있다. 물론 젠더 갈등이 사회적 갈등으로 커진 한국의 상황이나 코미디라는 장르물에서 이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무리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여성이 되고 나서도 특별한 반성이 없던 주인공이 개과천선하는 방식은 너무 섣부른 데다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자기만 알던 주인공이 여성이 되어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며 가족 등 소중한 것의 진짜 의미를 깨닫는다는 내용으로 보기에도 얄팍한 면이 있다. 코미디에 뭐 그리 많은 것을 원하냐고 묻는다면, '투씨'나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예시를 들고 싶다. 웃음과 감동과 메시지를 모두 잡는 게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다.
오히려 영화 오프닝을 책임졌던 유재석과 조세호의 '유퀴즈' 장면이나 한정우가 즐겨보는 유튜브 채널인 '빠더너스 BDNS' 크루인 문상훈, ASMR 뷰티 크리에이터를 지향하는 여동생과 트로트 가수 이찬원에 홀딱 빠진 시니어 유튜버인 한정우의 엄마(오민애)처럼 현실적인 소재를 패러디한 장면들이 신선한 웃음을 선사한다. '유퀴즈'의 시그니처 같은 감동 인터뷰 장면에서 웃음 터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리라.
익숙한 설정에, 예상 가능한 웃음이 많지만 이 영화를 봐도 좋은 이유를 들자면 역시 조정석이다. 조정석은 '건축학개론'의 납뜩이, '엑시트'의 이용남,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이익준을 거치며 전 국민에게 유머러스한 '호감캐'를 이어왔다. 뮤지컬 '헤드윅'에서 드래그퀸을 연기하며 익숙한 여장의 경험도 여성으로 변신하는 한정우의 역할에 안성맞춤. 조정석이 고공비행을 펼치면서 그와 케미를 이루는 이주명, 신승호, 한선화 등도 함께 빛을 발한다.
'가장 보통의 연애'로 현실 기반적인 웃음을 선보인 바 있는 김한결 감독의 연출작인 여름 코미디 영화 '파일럿'은 오는 7월 31일 개봉한다.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10분이며 쿠키 영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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