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만 봉인가”... 억지로 걸게 하는 보호예수, 결국 상장 첫날 급등락만 심해져

노자운 기자 2024. 7. 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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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거래소가 상장을 추진하는 기업들에 과거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과거에는 상장 첫날 유통 가능한 주식이 전체의 40%만 돼도 허용되는 분위기였다면, 최근에는 유통 비율을 30% 미만으로 맞춰오도록 가이드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런 기조 속에서 벤처캐피털(VC)들만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VC들은 오래전에 투자해 상장 직후 주식을 팔 수 있더라도 자발적 보호예수를 감행하며 거래소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거래소에 굳이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일반 법인들과 달리, VC는 포트폴리오(피투자사)들이 상장할 때마다 거래소와 소통해야 하는 만큼 원치 않아도 자발적 보호예수를 걸며 엑시트(투자금 회수)를 미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장 질서를 위해 VC가 희생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난다고 보기도 어렵다. VC의 매물이 잠기면서 상장 첫날 이상 급등 현상이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아야 하는 투자자는 팔지 못하고, 매수 세력만 가담하면서 ‘주가 뻥튀기’가 심해지고 있다.

일러스트=챗GTP 달리

18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요즘 VC들이 거래소의 요구에 발맞춰 보유 주식에 자발적 보호예수를 거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최근 상장한 기업들을 보면, 의무가 없음에도 스스로 보호예수를 건 VC가 상당수 발견된다. 줄기세포 치료제를 만드는 엑셀세라퓨틱스의 경우 한국투자파트너스, SJG파트너스, 포지티브인베스트먼트, 델타인베스트먼트 등 벤처 투자사들이 보유한 주식 202만주에 1~2개월의 자진 보호예수가 걸렸다.

원칙적으로 상장 예비심사를 청구하기 전 2년 안에 투자한 VC는 상장 후 1개월간 보유 주식에 보호예수를 적용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들 VC는 이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일례로 한국투자파트너스는 엑셀세라퓨틱스에 2019년부터 2021년 3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투자했기 때문에, 마지막 투자 시점도 상장 예심 청구(2023년 11월)보다 2년 8개월 전이다.

3차원(3D) 비전 센서를 만드는 에스오에스랩도 마찬가지다. 투자한 지 2년 이상 지난 VC가 보유한 주식 268만주에 1~3개월 보호예수가 걸렸다. 전체 상장 주식의 15%가 넘는 규모다. 한중엔시에스에 투자한 브레이브뉴인베스트먼트, 오비트파트너스, 아이스퀘어벤처스도 투자한 지 2년 이상 경과한 뒤 상장 예심을 청구했음에도 주식에 자발적 보호예수를 걸었다.

한 VC 고위 관계자는 “일반 법인이야 상장하면 주식을 털고 나가면 그만이지만, VC들은 앞으로 거래소와 계속 봐야 하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투자한 지 10년이 지났어도 어쩔 수 없이 수개월간 보호예수를 거는 일이 허다하다”고 전했다.

거래소가 자발적 보호예수를 요구하는 것은 투자자 보호 때문이다. 지난해 6월 상장일 주가 상승 제한폭이 이른바 ‘따따블(공모가의 400%)’로 확대된 이후, 상장 직후 고수익을 노리고 바로 공모주를 팔아버리는 게 새로운 투자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이 때문에 개인 주주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고, 거래소는 기관 투자자들의 매물이라도 최소화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른바 ‘파두’ 사태도 거래소의 보수적인 태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상장 후 뒤늦게 터지는 악재 때문에 주가가 급락해 개인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는 걸 최소화하려면, VC 같은 기관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실제로 거래소는 파두처럼 기술 특례를 이용하는 기업들이 상장할 때 VC들에 자발적 보호예수를 특히 강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IB 업계 관계자는 “자율적 락업이라는 미명(美名)이 있지만, 이건 사실상 자율이 아니다”라며 “거래소가 상장 주관사에 눈치를 주고 주관사가 지나치게 몸을 사리다 보니 애꿎은 VC들만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투자자 보호 정책이 정말로 투자자 보호로 이어지는지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VC 주식 보호예수로 상장 첫날 이상 급등 폭이 커지고, 공모주 청약에 참여하는 기관투자자들도 상장 첫날 이상 급등을 믿고 비싼 값에라도 공모주를 최대한 끌어오기 위해 공모가를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청약 첫날 공모에 참여해야 더 많은 주식을 받는 ‘초일가점’ 때문에 기관은 다른 투자자들이 얼마를 써내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최고가를 적어내는 분위기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공모주 투자자 보호를 위해 자발적 보호예수를 강요하는 것 같은데, 상장 첫날 고가에 주식을 잡는 투자자도 결국 보호받아야 할 개인”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차라리 거래량이 최대치로 늘어나는 상장 첫날 VC 매물이 풀리면 시장에서 소화라도 되지, 한두 달 뒤 거래량이 급감했을 때 물량이 풀리면 주가 하락 폭만 더 커진다”며 “거래소의 근시안적인 가이드라인이 오히려 시장에 더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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