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신탁·부동산PF 등 자산 부실화…IMF외환위기 교훈, 잊은걸까
팬데믹 종료와 함께 본격적인 고금리시대가 열렸다. 풍부한 유동성을 토대로 리스크를 고려하지 않은 사업의 수익성 악화와 부실화는 예정된 수순이다. 2022년 9월 ‘레고랜드 사태’는 그 시작점이었을 뿐이다. 경제·금융권에선 종종 회자되는 격언이 있다. “수영장에 물이 가득 차 있다가 물을 빼면 누가 수영복을 입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 워런 버핏의 말이다. 리스크에 대비하지 않은 시장 참여자가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벌거벗은 금융시장
채권형 ‘랩 어카운트’(Wrap Account)와 채권형 신탁상품(이하 채권랩·신탁) 시장을 보자. 저금리 기간 동안 기업들은 단기 여유 운용자금을 요구불예금보다 더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채권랩·신탁에 넣었다. 이 상품은 금리가 하락(채권가격 상승)하면 수익이 나는 상품이다. 채권랩·신탁 시장규모는 급성장하면서 100조원대 시장으로 불어났다.
문제는 금리 상승기에 평가손실이 발생하면서 불거졌다. 레고랜드 사태로 시장금리가 치솟던 2022년 11월 당시 이 상품에서 발생한 평가손실은 약 4조원으로 추정됐다. 이 손실이 누구 것인지를 놓고 증권사와 고객의 다툼이 발생했다. 원론적으로 손익은 고객 것이다. 그러나 20여개 증권사가 100조원이 넘는 단기 운용 자금시장에서 경쟁하는 상황에서 증권사는 이 원칙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객의 환매 요구에 다른 랩·신탁상품의 채권을 임의 거래하는 방식으로 ‘돌려막기’ 대응한 것이다. 이런 행태는 한두 증권사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일부 증권사는 이런 행위가 법규 위반임을 인지하고 영업을 축소했으나 다른 증권사는 외려 다른 증권사에서 이탈한 자금을 유치하려 영업을 강화했다. 또 다른 증권사는 손실을 메우기 위해 투기적 거래에 나섰다. 이런 행태는 이후 금융당국의 조사와 검사로 드러나게 됐고 징계 절차가 진행중이다. 금리 급등기에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가 잘 드러난 사례다.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 시장에서도 금리 급등기의 일탈이 잘 확인된다. 건설업체는 각 사업장별로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들고 이를 하나의 회사로 간주해 사업을 진행했다. 시행사는 전체 사업규모의 10-20%의 자금만 투입하고 나머지는 은행 등 금융사에서 대출을 받거나 채권을 발행해 충당했다. 대출 또는 채권의 담보는 분양 등을 통해 들어오는 현금흐름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건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다. SPC 발행 채권은 일반적으로 신용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금융기관이 인수하는 것을 꺼린다. 시공사인 건설사가 그 채권에 대한 지급보증에 나서는 까닭이다. 지급보증에는 증권사들도 종종 참여한다.
고금리 환경은 이런 구조에 균열을 만들었다. 분양 사업의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분양을 매개로 한 현금흐름을 토대로 한 프로젝트 파이낸싱 곳곳에서 곡소리가 났다. 특히 앞서 말한 ‘지급보증’에서 파열음이 크다. 은행, 증권사 등 금융회사가가 지급보증을 한 곳에선 피에프 사업의 위험이 금융회사로, 시공사인 건설사가 지급보증한 곳에선 건설사에 사업의 위험이 그대로 옮겨가고 있다. 피에프 사업 리스크가 큰 태영건설은 이미 워크아웃에 돌입했으며, 롯데건설은 호텔롯데, 롯데물산 등 그룹 관계사의 지원받으며 버티고 있다.
세번째 장면은 계열사 자금 지원을 위한 계열사 카드사의 구매전용카드 실적에서 목격된다. 여신금융협회 자료를 보면, 카드사 9곳의 5월 누적 구매전용카드 일시불 이용액은 15조8841억원이다. 1년 전보다 11.8% 불어났다. 구매전용카드는 기업 간 거래에서 납품업체와 구매업체 간에 어음이나 외상 거래로 대금을 결제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카드로 결제하는 거래 수단이다. 통상 기업이 카드사에 채권 발행을 의뢰하고, 만기일에 대금을 치르는 구조다. 카드사 입장에선 수익성은 거의 없는 상품이지만, 매출 및 자산으로 잡혀 실적 산정에 이점에 있다. 특히 현대카드와 롯데카드 이용액이 많은 편이다. 올해 들어 현대카드 구매전용카드 누적 이용액은 6조190억원, 롯데카드 5조4309억원으로 전체 이용액의 72%에 이른다. 건설사들은 부동산 경기 악화에 건설채를 찾는 수요가 줄면서 자금조달 비용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부채비율도 지속 오름세를 보이고 있어 추가 신용등급 하락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구매전용카드를 이용하면 회계상 미지급금으로 처리돼 부채비율이 악화되지 않는다. 구매전용카드는 재무 상황 악화를 감춰주는 우회로로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 외환위기 교훈 잊었나
이상에서 본 3가지 특징적인 장면은 익숙하거나 이상해 보이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를 거치고 이에 대한 처방으로 도입된 제도의 취지를 볼 때 다시 한번 아이엠에프 외환 위기를 불러온 양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외환 위기의 핵심 중 하나는 대출 자금, 즉 자산 부실화였다. 은행은 일반 국민의 예금을 받아 그 자금을 기업에 빌려준다. 기업은 이 돈으로 투자를 진행한다. 예금 만기는 일반적으로 짧고 투자 사업의 만기는 길다. 국제결제은행(BIS) 규제를 의식하지 않은 은행은 대출한도를 생각하지 않고 대출을 실행했다. 자금 부족 상태에서 시중자금을 강제 동원하여 기업에 할당한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재벌이 형성됐다. 다시 말해 위기의 원인은 실물경제의 위험을 고려하지 않은 투자, 그리고 그로 인한 은행계정의 자산 부실화였다. 국제통화기금의 처방도 자산 부실화를 정확히 인식하는 것에 기반했다. △금융기관의 대출·투자자산에 대한 시가평가 △금융기관 자산에 대한 리스크의 적절한 반영 △한 계열사의 리스크가 대기업집단의 다른 계열사에 전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계열사 간 보증 축소 및 각 사의 독립 경영 △고객 자산과 회사 자산의 엄격한 분리를 통해 고객자산을 활용한 회사 또는 계열사 지원 금지 등이 국제통화기금의 핵심 권고 사항이었다.
현재 우리 눈 앞에 벌어지는 현상은 이런 권고와는 동떨어져 있다. 채권랩·신탁은 금융기관이 임의로 고객 자산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 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피에프 시장의 오늘날 모습은 지급보증의 연쇄 부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급보증은 기업이나 금융회사의 재무상태표에 적절히 반영되지 않고 장부외 부채(즉, 부외 부채)로 기재되는 탓에 제3자가 위험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 계열 건설사에 대해 구매 전용카드를 통한 지원은 그 구조상 계열사 지급보증임과 동시에 건설사의 부채 수준의 착시를 부른다.
이상에서 우리는 외환 위기를 초래한 시장·금융관행이 교정되지 않았고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의 뿌리가 흔들고 있음을 보았다. ‘외환 위기의 교훈을 잊었나’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한 번 실수할 수는 있다. 실수를 통해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면 된다. 하지만 유사한 실수가 반복되면 그것은 실력이라고 봐야 한다.
이용우 전 국회의원
필자 소개
이용우는 2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기업 지배구조, 공정거래 관련 입법 활동에 주력했다. 국회의원 전에는 현대그룹, 한국투자금융지주,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CIO, 인터넷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등을 거쳤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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