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 노동의 기쁨, 더 늦기 전에 [김은형의 너도 늙는다]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요즘 나의 깨알 재미 중 하나는 당근마켓에 나온 시급 알바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시급 1만2000원짜리 하원도우미라더니 달랑 3시간의 근무시간을 초 단위로 끊은 게 아닌가 싶은 업무 리스트를 빽빽이 적은 내용이나 베이비시터를 구한다고 하면서 퇴근한 부모 저녁 밥 준비를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은근슬쩍 끼워 넣는 작태를 캡처해 친구들과 함께 흉을 보다가 요새는 제법 진지한 알바 정보와 토론의 장으로 바뀌었다. “하루 3시간 노인 말벗과 식사 수발? 요거 괜찮네” “동네 시장에서 야채 소분하기. 이것도 할만한데?” “시급 2만원에 청소기랑 세탁기 돌리고 쓰레기 갖다 버려 달래. 당장 가서 하고 싶다.”
물론 엄연한 직장이 있는 우리가 당장 가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없다. 은퇴 이후에 재정 여건도 건강 상태도 마냥 쉴 수만은 없으니 뭐라도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미리 해볼 수 있는 일들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노년을 다루는 모든 조사 지표와 책들은 공식적인 은퇴 이후에도 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과도한 교육비는 물론 자식의 결혼 뒷바라지까지 부모의 의무가 된 한국에서 보통의 노년은 집 한 채 남아있으면 운 좋은, 빈털터리와 같은 말이고 국민연금은 편한 노후를 약속하지 못한다. 게다가 내 나이는 60살에 정년퇴직을 해도 5년 기다려야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하고 지금 환갑이면 옛날 40대 중반의 체력이라니 어떤 식으로든 일을 하는 게 당연해 보인다. 최근 은퇴하는 회사 선배들도 다시 어딘가 소속되거나 비소속 상태로 새 일을 시작한다. 게다가 나로 말하면 집 문제로 가정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입힌 전적이 있어 80살까지 일을 하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다.
나와 내 친구들이 당근마켓 알바를 흥미롭게 보는 이유는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의미 없이 소모적인 조직생활의 긴장과 성과 없이 머리만 쥐어짜는 정신노동의 허무에 질릴 대로 질려서 일 것이다. 또 세상이 급변하면서 지적 노동의 상당 부분이 육체 노동보다 손쉽게 대체 가능해졌다. ‘잡무를 줄여 일에 집중하려고 인공지능을 썼더니, 인공지능이 일을 하고 내가 잡무를 하고 있더라’는 누군가의 자조처럼 열심히 기사를 쓰고 있는 인공지능에게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최근 먹물 중장년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며 단순한 일상을 반복하는 초로의 삶을 그린다. 품위 있게 잘 생긴 아쿠쇼 코지와 근사한 음악들로 후광을 두른 영화의 주석 같은 책을 최근 읽었다. 35년간의 사무직 노동을 마치고 4년째 경비원의 삶을 사는 저자가 필명으로 3년 동안 소셜미디어에 쓴 짧은 일기들을 묶은 책(‘나는 가장 슬픈 순간에 사랑을 생각한다’)에서 “삶은 끊임없는 반복”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로 세상을 쓸며 걸으면” 찾아오는 “작은 평화”, “단순한 동작의 규칙적인 반복이 주는 안도”에 대해서 쓴다. 그의 글에는 단순 노동을 영화 보듯 구경하는 이가 품는 낭만과는 다른 질감, “견디는 것도 삶”이라는 걸 깨달은 노년의 육체가 담겨있어 영화보다 감동적이다.
물론 나는 아직 육체노동을 구경하고 있다. 내가 미래의 구상을 말하면 “노동은 쉬운 줄 아냐, 편의점에서도 계산 느린 늙은 이들은 안뽑아” 핀잔을 주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은퇴 뒤 지금까지의 월급으로는 나의 사회적 기여가 보상받지 못한 양 착각하며 한 자리 얻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대는 누군가의 모습을 나의 미래로 삼느니 지금부터 달리기와 구몬 수학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노년의 노동에 대한 조사보고서들은 은퇴 후에도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고용환경의 조성을 말한다. 서글프지만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대기업 부장도 과장도, 그리고 임원도 그들이 가진 전문성이란 대체로 은퇴 이후에는 쓸모가 없다. 80대 학자가 방대한 학술 번역 작업에 도전하는 전문성은 존경스럽지만 자신의 손과 머리가 아닌 타인을 부리면서 발휘할 수 있는 전문성이란 공허하다. 그러니 정부는 전문성을 활용할 수 있는 정년 연장 정책 같은 건 만들지 말기를. 대신 청년들과 일자리 싸움을 벌이지 않고 건강과 급여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일타 쌍피의 노인고용정책을 개발해주길 바란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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