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살인·살인미수 5건 중 1건, 젠더폭력이었다
가정폭력·교제폭력·스토킹·성폭력 순
한국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존재는 ‘친밀한 남성’ 이다. 19시간마다 한 명씩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당하거나 당할 뻔한다는 통계(한국여성의전화)는 이 말이 과장이 아님을 뒷받침한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가장 위험한 인물로 전복되는 순간 여성은 이별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친밀한 가해자의 폭력에서 피해자를 보호할 교제폭력 처벌 법안은 2016년 국회에서 처음 발의된 이후 8년여가 지난 오늘날까지 통과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교제폭력 신고는 2017년 1만 4136건에서 2023년 7만 790건으로 400% 증가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한겨레 젠더팀은 교제폭력 등 젠더범죄를 겪다 결국 사망에 이르는 사건 통계 파악을 시작으로, 수사 과정에서의 가해 위험성 판단 지침 검토, 피해자 유가족과 연구자 심층인터뷰 등을 통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안전하게 관계 맺음할 수 있는 토양을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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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발생한 살인(미수 포함) 사건 5건 가운데 1건은 가정폭력이나 교제폭력, 스토킹, 성폭력처럼 배우자나 전·현 연인 등 ‘친밀한 관계’에서 주로 발생하는 범죄가 발단이 돼 일어난 것이라는 경찰 통계가 나왔다. 올해 들어 ‘강남역 교제살인’이나 ‘거제 교제폭력 사망 사건’ 등이 이어지면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단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국가 기관이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범죄가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 규모를 대략적이나마 파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세계적으로 살해당하는 여성 대부분은 친밀한 사람으로부터 목숨을 잃는 경향이 있어 교제살인 등을 방지하고 실효성 있는 피해자 보호 대책 수립을 위해선 가해자와 피해자 간 관계를 중심으로 한 더욱 정밀한 통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겨레가 17일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경찰이 피의자를 검거한 전체 살인(미수 포함) 사건 764건 가운데 피해자가 살해당하거나 살해 위기에 처하기 전 동일범에게 가정폭력·교제폭력·스토킹·성폭력을 당한 사건은 147건(약 19%)이었던 것으로 집계(잠정치)됐다.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뻔한 피해자들이 앞서 겪은 범죄 피해는 △가정폭력 87건(59.2%) △교제폭력 38건(25.9%) △스토킹 18건(12.2%) △성폭력 4건(2.7%) 순이었다. 가정·교제폭력 같은 친밀한 관계 안에서 발생한 폭력은 ‘두 사람 간 다툼’ 정도로 가볍게 인식되곤 하지만, 살인 사건 5건 중 1건의 피해자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에 앞서 젠더폭력을 겪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주로 여성이 친밀한 관계 안에서 겪는 젠더폭력 범죄가 살인 사건으로 이어진 비율을 통계로 드러내기 위한 경찰의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다. 최근 수년간 배우자나 전·현 연인 등으로부터 폭력을 겪다 결국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런 친밀한 관계에서의 살인 사건이 한해 얼마나 발생하는지 정부 차원의 통계가 없었다. 지난 2022년 경찰청의 범죄통계 고도화 작업 과정에서 조주은 여성안전학교폭력대책관이 살인 범죄에 앞서 일어난 젠더폭력 범죄를 파악해, 친밀한 관계에서의 살인 규모를 알아보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면서 이번 통계 산출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통계의 구멍을 메우는 건 여성인권단체인 한국여성의전화의 분석 자료다. 이 단체는 2009년부터 해마다 ‘분노의 게이지’란 이름으로,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 살인(미수 포함)’ 건수를 취합해 분석 결과를 발표해 왔다. 그러나 이 또한 언론이 파악하지 못한 사건은 취합되지 않아 실제 규모보다 과소 추정되는 한계가 있다. 한국여성의전화 분석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남편이나 연인 등 친밀한 남성에 의해 살해된 여성은 최소 138명, 살인미수 등 위기에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11명이었다.
전문가들은 살인 사건의 원인을 파악해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의 위험성을 통계로 보여주는 작업은 의미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현실에서 벌어지는 관련 사건 규모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선 보완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이번 통계는 살인 사건 담당 수사관이 피의자가 범행에 앞서 저지른 성폭력·성매매·가정폭력·스토킹·교제폭력 중 한 가지를 ‘범죄통계원표’에 입력하는 방식으로 집계했다. 그러나 젠더폭력 범죄는 폭행·성폭력·성매매·감금·협박 등 여러 종류가 중첩돼 발생되는 만큼 한 가지 원인만 기재할 경우 실제 범죄 양상을 담지 못할 수 있다. 살인이나 살인 미수에 앞서 교제폭력과 스토킹 피해가 동시에 있었던 경우 스토킹 기입을 원칙으로 한 까닭에 교제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 규모는 과소 추정될 여지가 있다.
이번 분석 대상엔 가해자의 폭력이 원인이 돼 피해자가 숨진 상해치사 범죄는 포함돼 있지 않다. 지난 4월 경남 거제 집에서 자고 있다 무단 침입한 전 연인에게 폭행을 당한 뒤 결국 숨진 사건 같은 경우가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젠더폭력 수사 경험이 많은 한 경찰은 “수사관마다 역량 차가 있고 기입 기준도 달라 젠더폭력에서 살인 범죄로 이어진 사건 규모가 과소 집계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해마다 살인·사망사건 700여건을 모두 되짚어 보자”고 제안했다.
지난 2020년 유엔 자료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살인 피해자의 80%는 남성이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친밀한 관계인 살인 사건만 따로 떼어내 보면 피해자의 80%는 여성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는지 확인하기 위한 첫걸음은 성별 분석이다. 경찰청이 국회에 제출한 잠정통계엔 살인·살인미수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별 구분이 돼 있지 않다. 김효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여성은 남성보다 살인 사건에 연루되는 비율은 낮지만, 살해당하는 여성 다수가 친밀한 파트너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어 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려면 성별에 따른 통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살인과 살인 미수 사건을 합쳐서 분석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나왔다. 한민경 경찰대 교수(행정학)는 “국내의 경우 살인 미수(예비 포함) 피해자는 남성이 조금 더 많고, 살인 피해자는 여성이 더 많다”며 “그런데 두 유형을 합쳐 놓으면 사망에 이른 피해자는 여성이 더 많다는 사실이 가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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