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억 헛돈 쓴 서울 한복판 ‘유령 마을’, 8년 만에 헐린다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돈의문 박물관 마을. 좁은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니 1960~1980년대 분위기의 마을이 나왔다. 서울 도심인데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이 한적했다. 이름은 박물관 마을이지만 떡볶이 집과 옛날 오락실, 바비큐 식당 등이 뒤섞여 있다. 건물 2층에는 1964년 개봉한 ‘맨발의 청춘’ 영화 광고가 걸려 있었다. 마을 안쪽 신축 한옥에서는 한식 등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목요일~일요일에만 문을 연다.
서울시가 이날 이 마을을 철거하고 경희궁과 묶어 서울광장 10배 크기의 역사문화공원을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신축 한옥 등 일부 건물을 제외하고 대부분 철거해 2035년까지 공원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철거는 내년 하반기에 시작할 계획이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박원순 전 시장 시절인 2017년 조성했다. 박 전 시장의 대표적인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꼽혔다. 이 일대는 원래 노후 주택, 식당 등이 모여 있던 ‘새문안마을’이라는 동네였다. 이 지역을 재개발하면서 서울시가 조합에서 기부 채납 받은 땅 9100㎡(약 2700평)에 박물관 마을을 조성했다. 당시 서울시는 “동네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며 낡은 식당 건물 몇 곳을 남기고 옛 골목도 재현했다. 곳곳에 벽화도 그렸다. 마을을 조성하는 데 330억원이 들었다. 재개발 지역에는 GS건설이 경희궁자이 아파트를 지었다.
서울시는 박물관 마을을 도심의 새로운 명소로 만들려고 했으나 좀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다. 코로나 시절에는 음식점, 공방, 갤러리 등이 줄줄이 문을 닫으며 ‘유령 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인근 아파트 주민 안모(39)씨는 “서울 도심인데 밤에는 마을 앞길을 지나가기 무서울 정도였다”고 했다.
2021년 복귀한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2년부터 민간 업체에 마을 운영을 맡기고 한식, 한복 등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매년 20억원씩 들었다. 하지만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는 게 서울시 평가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후 조금씩 방문객이 늘고는 있지만 여전히 활용도가 낮고 도심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고 했다.
2017년부터 서울시가 공사비, 위탁 운영비 등으로 쓴 돈은 480억원. 월 평균 방문객은 4만명 수준에 그쳤다.
그동안 서울시의회에서도 “서울 도심 금싸라기 땅이 사실상 방치돼 있다” “세금 낭비 사례”라는 지적이 계속 제기됐다. 일부 시설의 입찰을 두고는 특혜 의혹이 일기도 했다.
서울시가 2022년 박물관 마을을 자체 평가한 결과를 보면 운영상 허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서울시는 박물관 마을이 주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메타버스, 여행 글쓰기 등 강의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등 본래 취지와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족한 홍보와 시민 참여도 문제로 지적됐다. 박물관 마을은 2022년 6월 ‘돈의문 미디어 아트쇼’를 열고 방문객 50명을 대상으로 인증 사진을 올리면 상품을 주는 이벤트를 열었지만 참가자는 10여 명뿐이었다고 한다.
도시나 문화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근현대 유산을 보존한다고 했지만 마을 건물 대부분이 2017년 당시 신축한 것이고 과거 모습을 그대로 고증해 재현한 것도 아니다” “서울의 사대문 중 유일하게 복원되지 못한 서대문(돈의문) 자리가 박물관 마을 근처인데 차라리 돈의문을 제대로 복원했어야 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희정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근현대사 속 건물을 모아 박물관처럼 만들어보겠다는 취지는 좋았으나 현실은 달랐다”며 “공간을 조성해 놓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니 세금만 낭비하고 방문객들도 한 번 들르고 마는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서울 도심은 녹지가 부족한데 박물관 마을 대신 공원을 조성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인근 주민 천모(52)씨는 “동네 사람들조차 마을 안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며 “서울 도심 한가운데 좁은 골목길과 2~3층짜리 건물들이 있는 게 엉뚱한 것 같다”고 했다.
이날 서울시 발표를 두고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세금 쓰고 7년을 돌아왔다” “정책 실패란 이런 것” 등 지적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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