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미래 알려주진 않잖아요”… 불안한 현대 사회 파고든 오컬트 열풍
영화 ‘듄’은 인공지능(AI)의 지배에 맞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고, 초능력자 종교 집단이 득세한 미래를 그린다. 올해 상반기 한국 영화 시장은 ‘듄’의 세계관이 도래한 듯했다. 영화 제작에 AI 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반면, 관객들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오컬트(초자연적 현상) 영화에 열광했다.
올해 공식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긴 한국 영화는 ‘소풍’ ‘파묘’ ‘범죄도시4′ ‘핸섬 가이즈’ 4편으로 이 중 2편이 오컬트 영화였다. ‘파묘’는 묘 이장을 둘러싸고 무당과 풍수사, 장의사에게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그리며 오컬트 영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지하실에 봉인됐던 악령이 풀려나면서 시작되는 ‘핸섬 가이즈’도 오컬트와 코미디를 결합해 137만 관객을 모았다. 영매를 통해 악마를 불러내는 독립예술영화 ‘악마와의 토크쇼’도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장기 상영 중이다.
마니아들의 하위 문화로 여겨졌던 오컬트는 방송·OTT 콘텐츠까지 휩쓸었다. SBS ‘신들린 연애’와 넷플릭스 ‘미스터리 수사단’은 각각 연애 예능, 추리 예능에 오컬트 요소를 더했다. ‘신들린 연애’는 MZ세대 점술가들이 모여 서로 연애운을 점치고 절에서 데이트하는 등 기존 연애 프로그램에서 볼 수 없던 장면으로 ‘나는 솔로’를 제치고 화제의 연애 예능 1위(랭키파이 기준)에 올랐다. 마케팅을 위해 만든 무료 테스트 ‘나의 60갑자 운명패 뽑기’는 140만명이 넘게 참여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한국에서는 대중적인 요소를 섞어서 오컬트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무속 신앙과도 결합하면서 대중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장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했다.
무당과 귀신, 샤머니즘을 탐구하는 한국형 오컬트 다큐멘터리도 나왔다. 11일 공개된 티빙 다큐멘터리 ‘샤먼: 귀신전’은 접신을 경험했다는 제보자와 무속인 10여 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매일 밤 귀신이 자신을 덮치려 한다는 출연자나 무당의 운명을 타고난 모녀 등의 눈길을 끄는 사례들을 여과 없이 비춘다. 제작진은 귀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기보다는, 무속의 치유 기능에 초점을 맞췄다는 입장이다. 박민혁 PD는 “후배들과 MZ세대에게 이 소재가 통할지 이야기를 나눴는데 ‘귀신의 쓸모’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믿는다는 것이다. 샤머니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소비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 같았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오컬트 신드롬 밑엔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깔렸다고 분석한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심리 상담을 받듯 타로나 사주, 신점을 찾는 청년층도 늘고 있다. 성해영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는 “과학이 미래를 예측하거나 삶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진 않는다”면서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삶이 힘들 때 영적인 차원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인간의 욕구를 막을 순 없을 것”이라고 했다. 60%를 넘은 비종교 인구와 20·30 세대의 탈종교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성 교수는 “제도화된 종교의 힘이 약해지면서, 억눌려 있던 무속 신앙이 수면 위로 올라온 측면도 있다”고 했다.
기술 발달로 비대면 점술 시장이 커지면서 오컬트 콘텐츠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도 낮아졌다. 역술인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홍보하고, 어플·유튜브 등을 통해 비대면으로 가볍게 운세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게 됐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전문적인 심리 상담에 경제적·심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청년들이 간편한 서비스처럼 점술을 이용하는 것 같다”면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듣고 위안을 얻는 것까진 괜찮지만, 부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자기 암시 효과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과신은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오컬트(Occult)
사전적으로는 ‘주술적인, 불가사의한’이란 뜻으로,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컫는다. 오컬트 영화는 악령·귀신·주술·예언·사후 세계 등을 다루는 장르로 ‘악마의 씨’ ‘엑소시스트’ 등이 흥행하며 공포 영화의 하위 장르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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