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수미 테리에 명품백 선물… 블링컨 회의자료 등 받아”
총 31쪽 분량인 공소장에는 테리가 2013년부터 미국에 외교관 신분으로 파견된 국정원 요원들에게서 제공받은 선물과 식사 내역, 나눈 대화 등이 자세히 적혀 있다. 또 테리가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 매장을 국정원 요원과 함께 방문한 모습, 국정원 요원과 같이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모습 등이 찍힌 폐쇄회로(CC)TV 사진도 첨부돼 있다.
장기간 미 연방수사국(FBI) 등의 감시를 당했지만 국정원이 사실상 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게 드러난 것이다. 공소장에 따르면 FBI는 이미 2014년 11월경 테리를 만나 국정원과의 접촉에 대해 조사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국정원의 ‘보안 의식’이 안이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으로 미국을 상대로 한 공공외교 활동 위축이 불가피해지는 등 ‘정보 참사’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연방 검찰은 공소장을 통해 테리가 FARA 에 등록하지 않은 채 불법 로비 활동을 벌인 근거로 국정원의 다양한 접대 내역을 제시했다.
국정원 요원은 2019년 11월 테리와 함께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주 체비체이스에서 2845달러(약 392만 원)짜리 돌체앤가바나 코트를 구매했다. 둘은 같은 날 워싱턴의 한 가게에서도 2950달러짜리(약 407만 원) 보테가베네타 가방을 샀다.
돌체앤가바나 코트는 이 직원의 신용카드로 계산했고 외교관 지위를 활용해 면세 혜택도 받았지만, 구매 실적은 테리의 계정에 등록됐다. 테리는 이틀 후 코트를 반납하고 4100달러(약 566만 원)짜리 크리스찬디올 코트를 바꿨다. 차액은 본인이 부담했다. 또 다른 국정원 요원은 2021년 4월 테리와 워싱턴의 루이뷔통 매장에 들러 3450달러(약 476만 원)짜리 가방을 사줬다.
연방 검찰은 테리가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참석한 2022년 6월 회의 내용을 국정원 간부에게 흘렸다는 의혹도 공소장에 적시했다. 당시 내용은 외부 유출이 금지됐지만 테리는 수기(手記) 2쪽 분량의 메모를 만들었다. 테리는 회의 직후 외교관 번호판이 붙은 국정원 직원의 차량에 탑승했다. 연방 검찰은 이 직원이 메모를 사진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해당 메모의 사진 또한 공소장에 증거 자료로 첨부돼 있다.
공소장에는 한국 외교 당국과 테리가 공조한 내용도 포함됐다. 테리는 지난해 1월 10일 국정원 요원을 만나 “한미 핵협의그룹(NCG)을 구축하고 싶다”는 한국 정부의 요구 사항을 전달받고, 이후 1월 19일 기고문에서 핵협의그룹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 공소장에는 국정원 요원이 테리를 통해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윤석열 정부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고문을 투고하도록 했다는 내용도 있다.
우리 정보당국의 비공식 활동이 통째로 미 정보당국 감시망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을 두고 정보 활동과 보안에 큰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상황에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테리를 우리 정보당국이 비공식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미 정보당국이 주시하고 있을 것이란 가능성을 (우리 정부가) 인지하지 못한 건 분명 부주의했다”고 지적했다. 다른 외교 소식통은 “테리 공소장엔 그가 우리 대사관 차량을 타고 이동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정보당국자와의 식사 중 대화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 담겨 있다”며 “은밀한 정보 세계에서 허술한 정보 활동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라고 했다.
과거부터 우리 정부의 정보 활동은 상대적으로 접근이 쉽고 신뢰할 만한 한국계 미국인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2010년대 미국 관련 업무를 했던 전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예전부터 한국계는 주한 대사관에도 거의 보내지 않을 만큼 자국 정보 유출 등 문제에 민감했다”면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정보 활동을 우리 정부가 신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했다.
밀워키=문병기 특파원 weappon@donga.com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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