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필터’ 입힌 추상부터 ‘다중우주 팝아트’까지···두 거장의 세계 엿보다
‘감정 필터’로 바라본 루아르강
다채로운 색으로 겹치며 황홀
나치·홀로코스트 잔혹함 표현도
·
제임스 로젠퀴스트
빛나는 우주 한가운데 원형 거울
‘나는 무엇인가’ 존재에 대한 물음
전쟁 반대 등 사회참여 적극
그의 머릿속에서 진짜 풍경이 시작됐다. 강의 모습은 아침과 저녁, 계절과 날씨에 따라 변화무쌍한 법이지만 올리비에 드브레는 거기에 자신의 감정이란 필터를 추가했다. 폭풍우가 치던 날 루아르강의 풍경은 드브레의 마음 속에 청색과 진보라, 회색과 검정색으로 피어났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 나오는 수많은 다중우주의 입구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럴까. 제임스 로젠퀴스트는 ‘수학적 다중우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신비롭게 빛나는 다른 차원의 다중우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매끄럽게 빛나는 금속성 물질로 그려놓았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해외 두 거장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전시가 나란히 열리고 있다. 프랑스 서정 추상의 대가로 꼽히는 올리비에 드브레(1920~1999)의 국내 첫 개인전 ‘마인드스케이프’가 경기도 수원시립미술관에서, 미국 팝아트를 이끈 작가 가운데 하나인 제임스 로젠퀴스트(1933~2017)의 국내 첫 미술관 회고전 ‘유니버스’가 서울 종로구 세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나치의 잔혹함부터 루아르강의 풍경까지
“나는 풍경이 아니라 풍경 앞에 서 있는 내 안의 감정을 그린다.”
올리비에 드브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불었던 서정적 추상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자연 풍경을 보되, 풍경이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심상을 색채와 구성으로 표현했다. 전시에선 초기작부터 1990년대까지 작품까지 70여 점의 대표작과 영상, 사진을 볼 수 있다.
드브레가 처음부터 ‘마음의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17세에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건축 공부와 회화를 병행하던 드브레는 피카소와의 만남으로 입체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드브레는 초기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자행된 유대인 학살에 대한 공포심을 그려냈다. 초기작들에선 피카소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살인자, 죽은 자와 그 영혼’(1946), ‘나치의 사악한 미소’(1946) 등의 작품에선 각진 형태와 날카로운 선, 음영 등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기호로 홀로코스트의 잔혹함을 표현했다.
드브레의 그림은 1950년대 이후 변화한다. 미국 여행 중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마크 로스코를 만난 후 그의 캔버스는 다채로운 색채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드브레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곳은 프랑스 투르의 루아르 강변이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루아르강을 그린 세 점의 그림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루아르의 방’이다. 화폭이 3m에 이르는 ‘루아르의 연보라’(1985), ‘검은 얼룩과 루아르의 황토빛 분홍’(1985~86), ‘루아르의 흘러내리는 황토색과 붉은 얼룩’(1987)이 관객을 둘러싸듯 걸려 있다. 낮은 조도의 조명 속에 공중에 걸린 그림은 캔버스 위에 얇게 쌓아올린 안료들의 색채의 겹쳐짐과 음영까지 잘 보여준다. 폭우에 휩쓸렸다가, 붉은빛 황톳물이 됐다가, 해질녁 노을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채로운 빛이 뒤섞여 잔잔해진 수면의 풍경을 파노라마로 보는 듯하다. 드브레가 마음의 붓으로 그려낸 풍경은 관객의 마음에도 감정적 약동을 불러 일으킨다.
전시에선 드브레가 노르웨이, 미국, 일본, 멕시코 등 세계를 여행하며 그곳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그림들도 함께 볼 수 있다. 드브레는 무대 미술까지 영역을 확장했는데, 드브레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미국의 현대무용가 캐롤린 칼슨이 감독한 ‘사인(Signes)’의 영상도 전시 말미에 볼 수 있다. 1997년 바스티유 오페라에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초연한 ‘사인’은 드브레가 무대미술과 의상디자인을 담당했다. 10월20일까지.
뉴욕 옥외 광고판 그림에서 다중우주의 세계까지
핫소스를 뿌린 파스타 위에 핵폭발을 연상시키는 붉은색 버섯구름이 피어난다. 진분홍색 배경에 서로 총을 겨눈 두 손을 그린 그림은 전형적인 팝아트를 연상시키지만, 녹아내리는 시계 등이 그려진 그림은 영락없이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를 떠올리게 한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으로 대표되는 미국 팝아트의 특성을 제임스 로젠퀴스트는 일정부분 공유하는 동시에 훌쩍 벗어난다. 광고와 소비재의 이미지를 활용하면서도 이를 비틀어 정치·사회적 비판의식을 담아낸다.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보이던 로젠퀴스트의 그림은 우주적 스케일로 나아간다.
로젠퀴스트는 1950년대 미국 옥외광고판 그림을 그렸다. 코카콜라 광고 등 유명 옥외광고가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함께 그림을 그리던 동료가 사다리에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을 계기로 그는 작품활동에 전념한다. 옥외 광고판은 그에게 생계를 이어갈 돈 뿐 아니라 이후 작품세계의 토대를 제공했다. 상업 광고에 등장하는 각종 소비재에 대한 감각, 대형 회화를 제작하는 스케일과 기술을 그에게 남겼다.
전시에선 핵전쟁과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부터 1990년대 미국을 강타한 에이즈에 대한 불안을 다룬 작품 등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예술가 로젠퀴스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는 현실에 참여적이었던 동시에 초현실적이었는데,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다수 선보였다. 로젠퀴스트는 1950~60년대 미국의 삶과 라이프스타일을 다룬 작품들로부터 시작해 생태, 환경, 정치 등 더 큰 관심사로 영역을 확장하고, 종국에는 지구 밖 우주로 관심을 확장했다.
‘시간 먼지-블랙홀’(1992)은 폭 10m가 넘는 대작으로 연필다발, 둘둘 말린 100달러 지폐, 1페니 동전 등 생경한 이미지가 과장되게 표현됐다. 냉전시대 우주경쟁에 우위를 점하려는 욕망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낸 듯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그림 ‘본질적 존재’(2015)는 다중우주에 대한 그의 관심과 탐구를 잘 보여준다. 반짝이는 크리스탈 조각처럼 빛나는 수많은 우주 한 가운데 원형 거울이 있다. 그림을 보는 관객들은 거울 안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드넓고 무한한 우주의 한 가운데 있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9월29일까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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