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내느니 한국 탈출"… 올해 자산가 1200명 짐싼다
캐나다·豪·싱가포르로 이민
부자 이탈, 세수 기반 허물어
24년째 그대로인 낡은 세제
아파트 한채 중산층도 부담
서울선 2030년 80%가 대상
세율 인하·자본이득세 도입
상속세제 고강도 개편 시급
고액 자산가 A씨(80)는 최근 가족들과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A씨는 "상속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때가 됐다. 한국에서 죽으면 재산 절반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데 캐나다는 상속세가 없는 데다 거주 여건도 좋다"며 "죽으러 이민 간다"고 말했다. 최고세율이 50%에 달하는 상속세를 피해 고소득층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주식 매각차액을 제외하면 해외 이민을 갈 때 들고 나가는 자산에는 세금이 매겨지지 않는다. 재산을 정리하고 상속세가 없는 캐나다·호주·싱가포르로 향하는 부자가 부쩍 늘어난 이유다.
과도한 세 부담이 결국 고액 자산가 '엑소더스'를 야기하면서 양질의 세원 기반마저 허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소득과 자산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데, 세금은 24년 전 상황을 기준으로 부과하며 세 부담이 중산층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는 비판도 많다.
17일 매일경제가 법무부와 통계청 출입국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이민 등으로 외국 국적을 취득해 한국 국적을 잃은 사람(국적상실자)은 2013년 1만9413명에서 지난해 2만5405명으로 30.9% 급증했다.
이 중에는 상속세를 피해 이민에 나선 사람도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세부 통계가 있는 2022년 기준으로 보면 국적상실자 가운데 상속세가 없는 캐나다·호주·싱가포르를 비롯한 13개국으로 옮겨간 국민(8316명)은 최근 10년 새 2배나 늘었다. 전체 국적상실자 10명 중 3명(32.7%)이 상속세를 매기지 않는 나라로 이주한 셈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과거에는 개인이 삶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기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국가 간 이동이 훨씬 활발해졌다"며 "상속세를 내지 않기 위해 해외로 이민 가는 사례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영국 투자이민 컨설팅업체 헨리&파트너스는 올해에만 국내 부자 1200명이 무더기로 한국을 떠날 것으로 봤다. 자산가 이탈 규모는 중국(1만5200명) 영국(9500명) 인도(4300명)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이다. 헨리&파트너스는 금융자산만 최소 100만달러(약 13억8000만원) 이상 쥐고 있는 부자들이 다른 나라에서 6개월 이상 머문 사례를 기준으로 삼아 자산가 이탈 규모를 추산했다. 자산가들이 가장 많이 정착하는 나라로는 아랍에미리트(UAE) 미국 싱가포르 캐나다 호주가 꼽혔다. 모두 개인소득세나 상속세가 없거나 세 부담이 크게 낮은 나라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부자들이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것은 국내에서 걷을 수도 있는 풍부한 세원이 해외로 나간다는 뜻"이라며 "세수 기반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상속세제 개편이 필요해진 상황"이라고 전했다.
더 큰 문제는 높은 세 부담이 중산층으로도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상속세 제도는 2000년 최고세율이 45%에서 50%로 높아진 뒤 변동이 없다. 반면 그동안 경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2000년 1428만원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지난해 4725만원으로 3배 넘게 뛰었다.
아파트를 보유한 중산층 타격도 덩달아 커졌다. 통상 10억원을 초과한 아파트부터 상속세를 부과하는데, 최근 집값 상승세로 지난달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12억218만원을 기록했다. 중산층 가구 거주지인 서울 3분위 아파트 평균 매매가(9억6188만원)도 과세 기준에 바짝 근접했다.
매일경제가 KB월간주택가격동향과 통계청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올해 서울지역 아파트 193만1000가구 중 10억원이 넘는 주택 비중은 39.9%(77만2400가구)로 이미 상당수 국민이 과세권에 들었다. 이 같은 흐름이 계속된다면 2030년 서울에서 상속세를 부담해야 하는 가구 비중은 80%로 급증할 것으로 추산됐다. 과세 대상이 되는 전국 아파트 비율도 올해 5.9%에서 2035년에는 32.6%까지 빠르게 높아질 전망이다.
우병탁 신한은행 부동산팀장은 "자산가치 상승으로 예전에는 부자라고 생각할 수 없던 사람들도 상속세 대상이 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최대주주 할증평가를 폐지하고 가업상속공제와 배우자 공제 한도를 늘리는 방식으로 세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주요국 대비 높은 세율을 인하하거나 자본이득세 도입 같은 처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최근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여러 국가가 기업 상속 시점에 세금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차후 기업을 더 경영하지 않고 팔아서 현금화하는 시점에 세금을 부과하는 자본이득세 형태로 전환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자본이득세로 변경하는 전반적 개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정환 기자 / 이희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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