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미래, 비관적이지만 ‘녹색 DNA 심기’ 포기할 순 없어요”

강성만 기자 2024. 7. 1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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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그린캔버스 인 DDP’ 전시 연 ‘그린 디자이너’ 윤호섭 작가

윤호섭 디자이너가 12일 오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둘레길갤러리 전시장에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지난 12일 찾은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디디피) 뮤지엄 3층 둘레길갤러리에는 멸종위기종인 남방큰돌고래 100여 마리가 실물 크기로 벽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린 디자이너로 알려진 윤호섭(81) 작가가 전시가 시작된 지난 5월13일부터 두 달 가까이 갤러리에서 직접 작업한 그림들이다.

전시장에는 작가가 2000년부터 택배 포장 테이프 등을 뭉쳐 만든 볼링공과 깨끗한 흙이 담긴 핀 10개가 놓여 있다. 한 외국인 관람객이 볼링공을 던지려다 “내가 만든 쓰레기로 다음 세대가 살아야 할 대지를 파괴하는 볼링 게임”이라고 쓰인 설명을 보고 조용히 볼링공을 내려놓았다.

윤 작가가 9월29일까지 여는 이번 전시 이름은 ‘그린캔버스 인 디디피(greencanvas in DDP)’다. 그린캔버스는 북한산 기슭에 자리한 작가의 작업실 이름이다. ‘그린 디자이너’ 윤호섭의 삶과 예술의 자취가 생생한 그린캔버스의 이야기를 전시에 고스란히 옮겨놓겠다는 취지이다.

“최근 전시장을 찾은 한 외국인 여성 관객이 건넨 휴대전화를 보니 번역기 앱에 ‘울음을 참고 있어요’라고 한국말로 쓰여 있더군요. 다 쓰러져 가는 노인이 이런 거를 하고 있으니 그랬을 겁니다. 그 뒤로는 전시장에 조금 일찍 나와 관객을 만납니다.”

‘그린캔버스 인 디디피’ 전시포스터.
윤호섭 작가가 그린 남방큰돌고래 그림이 둘레길갤러리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전시장에서 온화한 미소로 관람객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노작가에게 먼저 전시 콘셉트를 물었다. 그는 출품작 ‘어디를 그렇게 빨리 가시나이까?’를 가리키며 “공존”이라고 받았다. “같이 사는 거죠. 우리 주변을 봐요. 다들 1등, 서울대, 하버드대, 금메달을 향해 뛰잖아요. 너무 그러지 말자는 거죠. 그것 말고도 우리 주변에 진정한게 너무 많잖아요.”

그는 환경 파괴에 디자인 책임이 크다고 본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대량 파괴’의 순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2000년 국내 첫 그린 디자인 전시 ‘에브리데이 어스데이’를 열고 또 2008년부터 매년 “환경을 생각하는 좋은 사람들”과 ‘녹색여름’ 전시를 이어온 것도 이런 생각이 깔렸다. 그는 국민대 조형대 학장 시절인 1995년 ‘환경과 디자인’ 교양필수 과목을 개설했고 2003년에는 대학원에 국내 최초로 그린 디자인 전공을 열었다.

2008년 대학에서 퇴직한 그는 ‘인사동 티셔츠 할아버지’로도 유명하다. 2002년부터 코로나가 오기 전인 2019년까지 해마다 6개월(4~9월) 동안 일요일이면 서울 인사동에서 헌 티셔츠에 천연물감으로 환경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그려주는 퍼포먼스를 했다. “제가 그림을 그려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이번 전시에도 찾아옵니다. 그간 티셔츠 그림을 1만장은 그렸을 겁니다.”

1991년 처음 ‘환경’을 만난 이후 자신의 활동을 윤 작가는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녹색 디엔에이(DNA) 심기”로 설명했다. “티셔츠는 최소 1~2년은 입잖아요. 저에게 티셔츠를 선물 받은 사람들은 옷을 입을 때마다 제가 전하려 한 메시지를 떠올리지 않겠어요. 녹색 디엔에이가 그들에게 들어갔을 겁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기대하는 점이죠.”

전시장에는 한 이스라엘 여성 제대 군인이 그린 멧돼지 가족 그림도 있다. “얼마 전 전시를 찾은 20대 이스라엘 여성이 전역 후 세계를 돌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스케치북을 보여주더군요. 멧돼지 어미가 새끼를 돌보는 그림이 너무 평화스러워 그림을 받아 전시하고 있어요.”

그는 이번 전시는 지난해 15년을 맞은 녹색여름 전시도 겸한다고 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접하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에스엔에스 계정을 열어 환경 메시지를 더 적극적으로 전하는 한편, 녹색여름 전 작품 출품의 통로로 활용해왔다.

‘펩시’ 등 상업 디자이너로 잘 나가다
1991년 ‘환경의 가치’ 받아들인 뒤
차·냉장고 없애고 ‘프로급’ 골프 끊어

2000년 국내 첫 그린 디자인 전시
2003년 대학원에 관련 전공 첫 개설
18년간 ‘인사동 티셔츠 할아버지’로
“미래 없어도 제가 해야 할 일은 해야”

그는 2000년대 전까지 꽤 잘 나가던 상업 디자이너였다. 88년 서울올림픽과 91년 세계잼버리대회, 광주 비엔날레 등 여러 국제 행사 디자인에 참여했고 펩시콜라의 ‘펩시’ 한글 글꼴 도안도 맡았다. 하지만 디자인의 환경 폐해를 알게 된 뒤에는 상업 디자인을 하지 않고 공익 목적의 광고에만 참여해왔다.

일상의 변화도 컸다. 자동차를 버렸고 냉장고도 없앴다. 새 옷도 사지 않았다. 프로급 실력의 골프도 끊었다. “한때 골프 선수가 될 생각도 했었는데요. (그린 디자인 활동을 하면서) 일도 많아지고 차를 폐차시키면서 골프와 멀어졌어요. 그렇다고 골프를 혐오하는 것은 아닙니다. 골프에는 우주, 물리, 심리 등 모든 게 다 들어 있어요.” 만능스포츠맨인 그는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재학 시절 학교 대표 농구선수로 뛰었고 당구 실력도 500점이다.

지금도 옷을 사지 않느냐고 하자 그는 “아내가 가끔 사는 것 같다”면서 덧붙였다. “제가 영하의 날씨에도 집에서 난방하지 않고 전기 매트로 견딘다고 하자 사람들이 저를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보더군요. 돌았다고요. 그런 뒤로는 제 일상의 변화를 가능하면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윤호섭 작가가 지난해 자신의 전시 중 발생한 폐기물로 제작된 이번 전시 작품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윤호섭 작가가 전시장에서 비닐 위에 돌고래 그림을 그리고 있다. 디디피 뮤지엄 제공

그는 자신이 대회 포스터를 만든 1991년 고성 세계잼버리 대회를 기점으로 삶의 큰 변화를 맞았다. 당시 대회를 찾은 한 일본 대학생은 윤 작가에게 한국의 환경 자원봉사 활동 현황에 관해 물었다. 사회학을 전공하고 환경 동아리 활동을 하던 이 학생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윤 작가는 이 질문에 답하려고 환경단체 쪽과 접촉하면서 자연스레 환경의 가치를 받아들였다. 그의 삶을 변화시킨, 당시 호세이대 3학년 미야시타 마사요시는 지금 침술 의사로 일한단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고통을 치료하고 있죠. 이번 전시도 보러 온다고 했어요.”

그에게 어린아이들은 늘 특별한 존재이다. 전시장에서 아이들을 불러 다정하게 말을 걸고 지우개와 연필 같은 선물도 준다.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이니까요. 미래가 없으면 현재도 없고 과거도 없잖아요.” 그는 인사동 퍼포먼스 때 한 아이의 기억이 강렬하다고 했다. “엄마랑 같이 온 아이가 멀리서 저를 유심히 쳐다보더니 다가와 옷에 원자력발전소가 불타는 모습을 그려달라고 해요. 그 말에 아이의 옷 안에 신문지를 넣고 그려주었어요. 그 아이를 보면서 저는 희망을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희망의 씨앗이잖아요.”

그가 첫 그린 디자인 전시를 연 지도 24년이다. 그 사이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은 누구나 환경을 이야기해요. 기업도 녹색 경영을 말하지 않는 곳이 없어요. 하지만 그들에게 녹색 디엔에이가 실제 들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환경 문제를) 머리로만, 대응적으로만 접근합니다. 환경은 다 안다고 생각하고 제가 이야기하면 머리를 돌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윤호섭 디자이너. 신소영 기자

그렇다면 지구의 미래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낙관인가 비관인가? “답이 없어요. 비관적인데 비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건 저에게는 삶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으니까요. 미래가 있든 없든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현재 디자인의 가장 큰 역할과 책임은 환경 파괴 최소화이다.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쉽지 않은 과제라고 하자 그는 “후배들이 내 전시를 와서 보면 느끼는 게 있을 것”이라면서 오스트리아 출신 디자이너 빅토어 파파네크(1927~98)에 대해 말했다. “환경 쪽 유명한 디자이너입니다. 그는 수주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늘 이 작업이 세상에 어떤 의미이고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따져 물었어요.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했어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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