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확률적으로 말이 되나"…한화팬, 분노 폭발한 이유 [이슈+]
규제 사각지대 놓인 '랜덤 박스' 또 수면 위로
'확률형 아이템'과 사실상 같은 판매 방식인데
'확률 고지 의무' 해당 無…'팬심' 결합도 우려
"2만5000원짜리 '랜덤 피규어(모형 장난감, figure)' 10개를 구입했는데 모두 같은 종류더라고요. 억울해서 눈물까지 났습니다."
자신을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팬이라고 밝힌 A씨는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직접 찍은 피규어 사진을 공개하며 이같이 전했다. 그가 구입한 랜덤 피규어는 구단 공식 판매처에서 판매 중인 제품으로, 9종의 피규어가 무작위로 발송되는 이른바 '랜덤 박스'형 제품이었다.
A씨는 "모든 종류를 모두 모으고 싶은 마음에 10개를 먼저 주문했다. 안 나온 건 나중에 천천히 모아 가려고 했다"며 "이건 명백한 소비자 기만이다"라고 분노했다. 그와 유사한 사례가 쏟아지자, 한화 이글스 측은 "일부 고객에 동일 상품이 배달된 것을 확인했다. 2개 이상 구매한 고객에겐 제품을 추가로 발송하겠다"며 부랴부랴 해명에 나섰다.
무작위로 상품을 배송해주는 랜덤 박스의 '깜깜이 확률'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사실상 같은 방식으로 온라인 게임에서 판매 중인 '확률형 아이템'처럼 당국이 규제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종류·가격대 다양한 '랜덤 박스', 팬심과 결합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랜덤 박스는 종류와 가격대가 매우 다양하다. 현재 네이버 쇼핑에서 판매 중인 랜덤 박스는 다이어리를 꾸미는 용도로 사용되는 스티커 기준으로도 가격대가 1000원에서 12만원대까지 형성돼있다.
한 유명 랜덤박스 전문 홈쇼핑에선 9만9000원짜리 '브랜드 시계 랜덤박스'를 판매 중이다. 구매 페이지에는 수십 종류의 브랜드 시계가 랜덤으로 배송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해당 시계 중엔 320만원대인 스위스제 고급 시계도 포함돼있다. 이 외에도 해당 사이트에는 향수, 가방 등 다양한 종류의 랜덤박스가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이처럼 최근 몇 년간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다양한 종류의 랜덤 박스는 최소한 구입 비용과 같은 값의 물건을 넣어주는 것이 관례이나, 소비자는 더 비싼 가격의 물건을 바라고 이를 구입한다. 이에 따라 랜덤 박스는 늘 '사행성' 논란이 일어왔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최근까지도 랜덤 박스 관련 민원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며 "사기가 의심됐던 한 해외 쇼핑몰도 유명 브랜드 운동화를 두고 랜덤 박스처럼 '뽑기' 형태로 판매해 올해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고 말했다.
특히 아이돌, 프로 스포츠팀 등 팬들의 '팬심'을 활용한 랜덤 박스형 판매 전략이 과도한 구매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 설문 조사에 따르면, K팝 음반 구매자 중 절반 이상인 52.7%가 랜덤으로 포함된 포토카드 등 굿즈를 모으기 위해 앨범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아이돌의 팬인 누리꾼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같은 두 종류로 나온 같은 앨범을 각각 4장, 6장을 구입했다"며 "물론 CD 안에 있는 음원은 똑같다. 다만 포토카드가 랜덤으로 다 다르다 보니 모두 모으고 싶어 소위 '앨범깡'을 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확률형 아이템과 똑같은데 규제 피해가"
현재 공정위는 랜덤박스여도 어떤 상품이 들어갈 수 있는지 등 해당 상품의 주요 상품 정보는 소비자에게 반드시 고지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각에선 가장 핵심인 '확률 정보'에 대한 의무 고지 규제가 빠졌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판매되고 있는 온라인 게임상 확률형 아이템의 경우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 개정을 통해 올 3월부터 백분율 등 확률 정보 공개가 의무화된 상태다. 이에 앞서 한 유명 게임사가 유료 인기 아이템이 덜 나오도록 확률을 변경하고도 이를 사용자에게 알리지 않아 과징금을 부과한 사건이 규제로까지 이어졌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온라인과 실물이란 차이만 있을 뿐인데 확률형 아이템에만 확률 고지 의무를 부과한 것은 산업 규모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면서도 "다만, 판매 방식이 사실상 똑같다. 따라서 부작용도 유사할 수밖에 없으므로 실물 랜덤 박스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의 규제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성진우 한경닷컴 기자 politpe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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