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아트 대가가 된 간판장이…맨해튼 빌딩 외벽에서 벼린 붓끝
거장의 첫 직업은 ‘간판장이’였다.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과 더불어 1960년대 이래 미국 팝아트의 대표작가가 된 제임스 로젠퀴스트(1933~2017)의 청년 시절 과거다. 미네소타주 출신의 시골청년이던 그가 화가가 되고 싶어 단돈 300달러를 들고 찾은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고학하면서 돈을 번 일터는 맨해튼 도심 타임스퀘어 등에 있는 고층건물 외벽이었다. 여기서 영화 주연을 맡은 배우들과 위스키, 담배 따위의 간판을 그려 걸면서 밤에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작은 광고 도안들을 엮어서 매끈하게 번들거리는 산업용 도료를 발라 거대한 크기의 간판 이미지로 ‘뻥튀기’하는 게 일이었다. 위스키 그림만 100번 넘게 연속적으로 그려댔던 적도 있었다.
대중을 유혹하는 최신 유행의 상업광고였지만, 그리는 장인들은 밑바닥 대우를 받았다. 박봉에다 안전장치도 허술한 곤돌라에 매달려 목숨 걸고 일해야 했다. 1957년 동료 2명이 추락사하자 미련 없이 간판장이를 던지고 전업화가가 된다. 간판 작업의 모든 걸 내던진 것은 아니었다. 작은 도안들을 콜라주해 거대화면을 만들고 다채로운 산업용 안료를 구사해 색칠하는 요령과 안목은 평생 밑천이 된다.
팔레트 대신 잡지를 들고 도판들을 뜯어내며 이미지를 콜라주하는 특유의 방식을 개발하며 그는 팝아트 역사에 길이 남을 도상들을 구축한다. 스파게티 국수 자락, 여성 모델의 얼굴과 누드, 연필, 핵폭발, 버섯구름, 전투기, 권총, 우주, 별, 블랙홀, 폭탄, 자동차, 전구, 시계, 깡통…. 일상과 세계의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시적으로 거대한 화폭에 뒤엉키고 녹아들어 1960~2000년대까지 미국 사회의 단면을 풍자하고 상징하는 초현실적 기록화가 되었고, 말년에 우주와 세계의 시공간을 보여주는 파노라마의 화폭을 빚어내게 된다.
이처럼 다채로운 변모를 보여준 로젠퀴스트의 대작들을 이달 초부터 서울 신문로 세화미술관에서 대형기획전으로 선보이고 있다. 국내 미술관 가운데 최초로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그린 작가의 대작 회화 20여점, 회화의 바탕이 된 콜라주 소품, 아카이브 자료 100여점을 망라한 대규모 회고전 성격이다. 만화나 일상용 상품 등을 활용해 대중적 이미지를 구축한 워홀이나 올덴버그, 리히텐슈타인과 달리 그의 이름은 국내 관객에게 생소하다. 대형 광고판을 칠하는 밑바닥 화공으로 미술계 경력을 시작한 그였던 만큼 작품이 대작들이 많고 상업적 명성에 집착했던 다른 팝아트 작가들과 달리 반전∙반핵 등 강한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발신하는 특징도 지녀 거의 소개될 기회가 없었다.
두 개의 큰 방과 방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뤄진 이 전시는 이런 한국적 양상을 감안해 첫 방은 1960~1990년대 현실 비판적 성격의 팝아트 작업으로 꾸렸고 두번째 방을 1990~2000년대의 우주적 시공간을 보여주는 작업의 모음 공간으로 구분했다.
1963~1967년에 회화의 평면 화폭을 바탕으로 만든 실험적 설치작품인 ‘작은 도어스톱’을 첫 작품으로 내세운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빨간 캔버스에 그려진 당대 미국 가정의 전형적인 주택 평면도에 전구와 소켓을 부착한 이 작품은 청년시절부터 도저한 사회적 문제의식과 실험 정신을 드러냈던 거장의 행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이어지는 1968년 작 데일리 초상화는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1968년 미국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시위대를 부추기는 발언을 쏟아낸 리처드 데일리 당시 시카고 시장을 하늘거리는 폴리에스터 필름에 그린 초상화를 통해 풍자한 작품. 이후 여러 대작에서 잡지 등의 이미지를 뜯어내 콜라주하며 선보일 그의 현실비판 의식을 일러주고 있다. 서로를 겨눈 권총을 통해 이 시대 진짜 표적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1996년 작 ‘동업자 간의 예의’도 강렬한 인상을 아로새기는 작가의 후반기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를 유영하는 추상적 이미지들과 별, 일상 사물들의 변형된 모습들을 콜라주한 90년대 이후 후기작업들 가운데서는 1992년 작업한 대작 ‘시간 먼지-블랙홀’이 눈에 띈다. 가로 길이만 10m를 넘는 대작으로 우주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는 미국의 욕망과 이에 따른 여러 모순적 상황들을 과장된 화면에 표현했다. 움직이는 거울 하나를 부착한 화폭에 추상적인 우주와 세상의 이미지를 투사한 2015년 마지막 작품인 ‘본질적 존재’도 볼수록 눈맛이 새롭게 다가오는 수작이다.
현대미술사에서 굵직한 자취를 남겼고, 1980년대 한국의 비판적 리얼리즘(민중미술)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진보적 팝아트 작가의 회화 작업을 원작 중심으로 소개한다는 의미가 있는 전시 마당이다. 9월29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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