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피해 ‘경계의 섬’ 오키나와… 피해자뿐인 역사는 없다”
구메지마 주민 학살사건 다뤄
현지인 전쟁 증언 듣고 소설로
“본토인에 피해 당한 섬사람들
조선인 차별한 가해자이기도
전쟁통에 학살 가담한 소년들
거대한 역사속 피해자일 수도”
제철소와 조선소의 노동 현실을 기록하고(‘철’(2008), ‘제비심장’(2021)) 집요한 끈기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재현하는(‘한 명’(2016), ‘듣기 시간’(2021)) 김숨의 소설을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기억 복원 작업’으로 정의했다. 새 장편소설 ‘오키나와 스파이’(모요사)에서도 김 소설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오키나와(沖繩)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들여다보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는 피해와 가해의 경계를 파고든다. 이를 통해 피해자의 기억 복원을 넘어 전쟁에 휘말린 모든 이의 기억 복원을 시도한다.
최근 문화일보와 만난 김 소설가는 “오키나와 전쟁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모호한 경계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스스로 일본 본토인들에게 희생당한 피해자인 동시에 조선인을 차별하고 살해한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덧붙였다.
오키나와 본섬 서쪽으로 100㎞ 떨어진 구메지마(久米島)에서 일어난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학살 사건’이 소설의 모티브가 됐다. 일본에서는 물론 오키나와 문학에서조차 조명되지 않았던 참극이다. 소설은 일본제국의 패망 직전인 1944년 9명의 섬 주민이 무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섬 소년들을 ‘인간 사냥꾼’으로 양성하고 섬 주민 중 스파이가 있다며 서로 의심하도록 만드는 일본군의 만행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군인과 ‘인간 사냥꾼’들은 1세 영아와 태아를 포함해 스파이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고 마침내 ‘조선인 고물상’으로 불리던 실존인물 구중회와 그 일가를 몰살하기에 이른다.
김 소설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조사하던 중 오세종 류큐대 교수의 글을 통해 처음 구메지마 섬의 비극을 접했으나 소설로 쓰고 싶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사키마 미술관에서 ‘오키나와 전도(戰圖)’ 특별전을 관람하던 중 구중회 일가의 비극적 장면을 그린 작품을 다시 마주하고 쓰기를 결심했다. “마음속에 들어온 이야기를 거부해도 소용없더라고요.”
구메지마 섬에서 주민들을 만난 뒤 김 소설가의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구메지마 섬의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증언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요. 오히려 의무라고 생각하죠.” 그는 구중회의 큰아들과 동창이었다는 주민을 비롯해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꼼꼼히 받아적었다. 증언의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 증언을 담아내는 것이 ‘문학의 숙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모든 사람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전쟁의 상처는 마치 유전병처럼 후손에게 남겨져 지워지지 않죠.” 총 12개 장으로 구성된 소설에 살인이 일어난 4개의 장에만 ‘9명’ ‘1명’ 등 피해자의 숫자로 제목을 붙였다. 무제로 남겨진 8개 장에는 가족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미쳐버린 사람들, 미치지도 못해 차라리 미치게 해달라며 울부짖는 이들의 모습이 담겼다. 또한 자신도 모른 채 괴물로 변해가며 매일 밤 환영에 시달리는‘인간 사냥꾼’ 소년들의 고통도 고스란히 묘사된다. 전쟁에 휘말린 모든 사람의 비극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김 소설가는 직전 작품 ‘잃어버린 사람’(모요사)에서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살게 된 일본인 여성이 차별 속에 살아간 인생을 그리기도 했다. 스스로 제국주의 전쟁의 온전한 피해자라고 생각해 온 한국인들이 미처 자각하지 못한 기억을 복원해 낸 것이다. “한국인도 역사의 모든 순간에서 피해자일 수만은 없어요. 오키나와 사람들이 반성하듯 폭력과 차별의 가해자였던 순간들을 고백하고 반성할 때 앞으로 역사의 다음 페이지로 나아갈 가능성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본보와의 과거 인터뷰에서 “소설을 탈고한 뒤에도 소설 쓰기를 멈출 수 없다”고 밝힌 것처럼 김 소설가는 노동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계속 썼다. 이번에도 준비를 거쳐 ‘오키나와 연작’을 출간하겠다고 밝혔다. “소설의 독자들이 피해와 가해 구분의 명확성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치유, 화해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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