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장난과 경박함, 한동훈에 대한 기억상실증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인간은 감동적이고 훈훈한 뉴스보다 충격과 혐오를 주는 뉴스에 더 민감하다. 근원적이지만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한 고질적 이슈보다 말초적이지만 새로운 이슈에 더 이목을 집중한다. 미국 엠아이티(MIT)대학 시난 아랄 교수는 이것을 ‘새로움(novelty)의 가설’이라고 부른다. 정보의 진위나 사안의 중요도를 떠나, 따끈따끈한 새 소식, 그중에서도 센세이셔널한 뉴스에 더 열광하고 이걸 먼저 퍼뜨리는 것으로 사회적 우위를 과시하려는 욕구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주변의 돌발 상황과 위험을 재빠르게 감지하고 대처하려는 오랜 진화의 산물일 것이다.
문제는, 새로운 뉴스가 빠르게 쏟아져 나올 때 전체 맥락과 과정에 대한 인간의 기억이 급속도로 지워질 수 있다는 점이다. 상업주의 언론은 이런 부박한 기억상실증을 부추긴다. 새로운 정보를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자극적으로 전달하느냐가 조회 수를 좌우하니, ‘단독’과 ‘특종’ 경쟁에 혈안이 된다. 불과 몇달 전 일인데도 그때 일은 이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게 현재 상황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듯, 시치미를 떼기 일쑤다.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는데 언론의 관심은 온통 한동훈의 ‘김건희 문자 읽씹(읽고도 회신 안 함)’ 논란에 집중돼 있다. 한동훈 후보를 제외한 다른 세 명의 후보는 김건희 여사가 총선을 앞두고 사과 의사를 밝혔는데도 왜 응답하지 않고 무시해서 총선을 망쳤냐며 한 후보를 공격한다. 한동훈 후보는, 당시 김건희 여사나 대통령실에서 사과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더 파헤치면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다고 배수진을 친다. 한동훈 후보는 억수로 대진 운이 좋은 사람이다. 다른 후보들이 한동훈의 김건희 외면설, 한동훈-윤석열 불화설로 맹공을 퍼부을수록 그는 점수를 딴다.
지난 9일 열린 첫 티브이(TV) 토론회에서 한동훈,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네 명의 후보는 ‘김건희 여사가 사과했다면 총선 결과가 달라졌을까?’라는 질문에 모두 ○를 선택하면서 김 여사가 민심 이반의 뇌관이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책임을 한동훈에게만 돌리니, “그러는 너희는 그때 뭐 했는데?”라는 반문이 새어 나올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영부인의 눈 밖에 날까 전전긍긍하면서 쓴소리 한번 제대로 못 한 것에 대해 성찰하고 사과한 이는 아무도 없다. 그야말로 국민이 ‘격노’할 일이다.
덕분에 여론조사 결과는 한동훈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한국갤럽이 지난 9일부터 사흘간 전국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자 중 57%가 한 후보를 선호한다고 답했고, 경선에 반영될 ‘국민의힘 지지자와 무당층을 합한 응답자’로 보면 한동훈 선호도가 45%였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조). ‘읽씹 논란’이 일기 전에 비하면, 3주 만에 원희룡 후보는 3%포인트(18%→15%) 떨어졌고 한동훈 후보는 7%포인트(38%→45%) 상승했다. 다수 유권자가 윤석열 정부의 실정과 무능을 지적하고 견제할 여당 대표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엔 함정이 있다. 이변이 없다면 한동훈 후보의 당선이 유력한데, 과연 한 후보는 그런 국민의 기대를 충족할 수 있는 지도자인가? 대권에 대한 욕심 때문이든 소신 때문이든 책임 있게 발언하고 실행할 수 있는 정치인인가?
지난해 12월19일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 ‘민주당이 선전 선동을 하기 좋게 만든 총선용 악법’이라 규정했고, 같은 달 26일 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할 때도 ‘의견에 변함이 없다’고 못박았다. 윤 대통령이 김건희 특검법에 대해 국민 여론을 거스르며 거부권을 행사할 때에도 ‘거부는 당연한 것’(지난 2월7일)이라고 옹호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서는 시류에 따라 말을 바꿨다. ‘잘 모르는 일’(12월6일)이라고 발뺌했다가, ‘몰카 공작’(12월19일)이라고 분개하다가, ‘국민 눈높이에서 걱정할 만한 사안’(1월18일)으로 몸을 낮췄다가, 이로 인한 윤-한 갈등 이후 ‘저열한 몰카 공작은 맞는데, 경호 문제 등 국민이 걱정할 만한 부분이 있었다’며, 중언부언 아리송한 답을 내놨다.
윤석열 대통령과 친윤계 후보들의 자책골 덕분에, 실제 행적에 비해 한동훈 후보의 소신과 개혁성이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경쟁자 반사이익으로 그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얄팍한 말장난과 일관성 없는 경박함으로 그 직을 수행하기에는 대한민국 여당 대표의 자리가 너무 무겁다.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도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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