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쌀 과잉’ 옛말…구입량 제한 ‘진풍경’
소규모 쌀 가게들 여전히 성업
“수요 대응할 재고 없다” 30%
가격 급등…수입쌀 낙찰 급증
의회, 예의주시 속 대책 촉구
“쌀 재고 부족으로 한 가구당 5㎏으로 판매 수량을 제한한 품종도 있습니다. 쌀 과잉을 걱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상황이 이렇게 급변할 줄 상상도 못했네요.”
9일 찾아간 일본 도쿄 기타구(北區)의 쌀 가게 ‘시노하라’엔 수십종의 쌀이 판매되고 있었다. 일본의 쌀 가게에서는 큰 종이자루에 종류별로 쌀을 담아 놓고 고객이 원하는 만큼 덜어서 판매한다.
그런데 몇몇 자루엔 쌀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가게 주인 시노하라 히데히사씨는 “최근 저가미 위주로 쌀 재고가 부족해졌다”며 “35종류의 쌀 가운데 10개의 재고가 바닥나 현재 25종류만 판매하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지역마다 소규모 쌀 가게가 여전히 성업 중이다. 이들 쌀 가게는 개인과 식당 등 단골손님을 대상으로 쌀을 판매한다.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2022년 소비자의 21.3%(추정치)가 쌀 가게에서 쌀을 구입할 정도로 쌀 가게가 쌀 소매 유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
만성적인 쌀 과잉 국가였던 일본에서 쌀 가게를 중심으로 쌀 부족이라는 이례적인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쌀이 부족해지면서 쌀 가게들이 쌀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히데히사씨는 “나는 도매상과 스폿 거래를 하지 않고 산지 농민들과 연간 계약에 따라 20년째 직거래로 쌀을 조달하는데도 최근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스폿 거래’란 쌀을 보관하는 대형 저온창고가 없거나 자금력이 부족해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살 수 없는 소규모 영세 쌀 가게가 주로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쌀 도매상으로부터 그때 그때 필요한 물량만 현재 시세(스폿 가격)로 구입한다. 이런 방식은 쌀 재고가 부족해지고 가격이 오르면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재고 확보에 비상이 걸린 쌀 가게들이 스폿 거래 대신 산지를 수소문하기도 한다. 도쿄 인근 하다노시에서 쌀농사를 짓는 고이즈미 타쓰오씨는 “그동안 거래하지 않던 가게에서 ‘쌀을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이 온다”며 “이미 직거래 판매처가 있는 데다 올해는 남는 재고가 거의 없어 요청에 응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재고 부족은 도쿄 지역 쌀 가게만의 문제가 아니다. 효고현에 있는 한 쌀 가게는 “쌀을 충분히 조달할 수 없어 판매를 종료하기로 결정한 품종도 있다”고 귀띔했다.
일본미곡상연합회가 쌀 가게를 대상으로 최근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충분한 재고를 확보하고 있다’는 응답은 24%에 불과했다. 반면 ‘현재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재고가 없다’는 답변은 30%에 달했다. 나머지 46%는 ‘수개월분 수요에 대응 가능한 재고밖에 없다’고 답했다.
쌀 도매상 관계자는 “팔려는 매도자가 나오는 순간 거래가 성사된다”며 “그야말로 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재고가 부족해지면서 쌀 가격도 크게 올랐다. 도쿄도 미곡소매상업조합에 따르면 대표적인 저가미의 스폿 거래 가격은 지난해 가을 1만3500엔(60㎏) 정도였지만 최근에는 약 2만3000엔으로 70%가량 올랐고, 이 가격에도 쌀을 구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이 터져 나오고 있다.
도매가격 급등은 소매가격도 끌어올린다. 전국 슈퍼마켓의 판매 데이터를 수집한 ‘닛케이 포스(POS)’에 따르면 ‘아키타코마치’ 쌀은 5월19일 기준 1811엔(5㎏)으로 전년 동기 대비 23.5%나 올랐다.
쌀값이 오르니 수입쌀 인기까지 높아지고 있다. 일본은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에서 사실상 의무적 성격으로 수입해야 하는 쌀 물량(TRQ) 가운데 매년 약 10만t을 밥쌀용으로 들여오는데, 2023년산 수입쌀 입찰에서 최근까지 6만5532t이 낙찰됐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견줘 5배 많은 양이다.
쌀을 사재기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히데히사씨는 “최근 가게를 찾은 한 여성 단골손님은 쌀 20㎏을 한꺼번에 사려고 했다”며 “여름이라 쌀벌레가 생길 수 있으니 평소 사던 양만큼 사라고 권유했다”고 밝혔다. 일본에서는 가정용 쌀의 경우 한번에 주로 3∼5㎏씩 소량 구입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면서 “최근 한 신규 고객은 60㎏을 한번에 사겠다고 한 적도 있다”며 “하지만 재고가 부족한 종류의 쌀은 한 가구당 구입량을 5㎏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재고가 부족한 종류의 쌀과 충분히 남아 있는 쌀을 섞어서 파는 경우도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일본 의회도 최근의 쌀 부족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가미 도모코 참의원(공산당)은 11일 열린 농림수산위원회 회의에서 “개정된 ‘식료·농업·농촌기본법’에 따르면 ‘식료의 안전 보장이란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식료를 제때 구할 수 있는 상태’라고 정의했는데 지금 쌀 가게들이 쌀을 구할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며 정부의 신속한 대책을 촉구했다.
도쿄(일본)=서륜 기자, 김용수·박민철 특파원 seolyoon@nong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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