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낮인데도 1000석 매진… 관객이 안 오면 찾아갑니다

이태훈 기자 2024. 7. 17.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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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이 있는 발레’ 전석 매진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 단장
21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발레 해설 강연을 앞둔 최태지 전 국립발레단 단장은 “22년 만에 다시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의 춤을 보며 한 분이라도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든다면 가장 기쁠 것”이라고 했다. /마포문화재단

지금은 공연계의 전설이 된 이야기다. 1997년 5월 최태지 당시 국립발레단 단장은 서울 남산 국립극장 소극장(지금의 달오름극장)에서 국내 첫 ‘해설이 있는 발레’ 강연을 시작했다. 국립극장 공식 기록에 남아 있는 첫 프로그램의 평균 객석 점유율은 지금도 믿기 어려운 219.1%. 454석 극장에 996명이 몰렸고, 극장에 못 들어간 관객은 로비의 간이 의자에 앉아 모니터로 강연을 지켜보는 열기였다.

“국립발레단이 남산 국립극장에 세 들어 살 때였어요. 1년에 기껏해야 세 작품 정도나 올렸나. 무료 갈라 공연으로 관객들과 직접 만나는 강연을 열겠다고 하니 극장에서 ‘발레단이 왜 오케스트라도 없이 소극장 공연을 하느냐’며 못마땅해했어요. ‘다른 지원은 필요 없다. 소극장에 조명만 켜달라’고 설득해 첫발을 뗐죠.”

최근 서울 마포아트센터에서 만난 최태지(65) 전 국립발레단 단장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그가 활짝 웃으며 “실은 더 절박한 이유도 있었다”고 했다. “단장이 된 뒤 한 신문사 공연 담당 기자와 인사를 했는데 ‘우리나라에 국립발레단이 있었냐, 국립무용단은 들어봤는데’ 하는 거예요. 충격이었죠. ‘이대론 안 되겠다, 내가 발로 뛰고 관객에게 더 가까이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해설이 있는 발레’가 그 첫 결실이었어요.” 해설이 있는 발레는 매달 마지막 금요일 상설 공연이 됐고, 국립발레단이 객석 점유율 90%를 상회하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후 군부대, 시골 마을, 백화점 로비를 가리지 않고 국립 발레 무용수들이 직접 발레 작품을 선보이는 ‘찾아가는 발레’ 등과 함께 우리나라 발레 대중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낭만 발레의 걸작 ‘지젤’을 안무한 쥘 페로(1810~1892)의 안무작 ‘파 드 꺄트르(Pas de quatre)’. 이번 최태지 전 단장의 해설 발레 강연에선 원자승 홍익대 교수 등 전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무용수들이 선보인다. 사진은 지난해 마포아트센터 ‘해설이 있는 발레’ 공연 중 ‘파 드 꺄트르’ 장면. /마포문화재단

최태지 단장이 오랜만에 다시 ‘해설이 있는 발레’로 관객들과 직접 만난다. 오는 21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대극장 아트홀맥에서 열리는 ‘살롱 드 발레(Salon de Ballet)’ 강연. 국내 첫손 꼽히는 공연 전문가인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장 고희경 교수가 묻고 최 단장이 답하며 고전 발레의 걸작 중 명장면들만 골라 무용수들의 실연(實演)으로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자리다. 1000석 넘는 대극장, 일요일 낮 시간대인데도 티켓 예매가 열리자마자 매진됐다.

3년 임기를 네 번, 총 12년을 일한 국립발레단장, 직장인 대상 낮 공연의 흥행 신화를 만든 정동극장장 등을 거치는 동안 ‘매진 흥행’은 예술 행정가로서 그에게 일종의 ‘전문 분야’가 됐다. 최 단장은 “국립발레단 시절 ‘해설이 있는 발레’는 발레 대중화뿐 아니라 새로운 스타 발굴의 의미도 컸다”고 했다. “해외 발레 학교에서 실력을 갈고닦아 국립발레단에 합류한 젊은 단원들이 무대에서 주역으로 설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거예요. 고참 단원들 텃세도 없지 않았고요. 그때 김주원, 김지영, 김용걸, 이원국 등 당시로는 젊은 무용수들을 고참 단원과 짝을 지어 해설 발레 무대에 올렸죠. 관객들이 이들을 알아보고 열광하기 시작했어요. ‘발레 스타 탄생’의 시작이었죠.”

국립극장 앞 분수대에서 열리던 토요일 야외 공연에도 국립발레단 단원들을 내보냈다. “단원들이 직접 고무판을 깔고 음악 큐 사인까지 냈어요. 타워 호텔(지금의 바냔트리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하던 사람들이 수영복 차림에 튜브를 허리에 걸고 보러 왔어요. 유모차 끌고 온 엄마가 ‘아이 낳고 키우느라 못 봤던 지젤을 보며 눈물 흘렸다’는 편지를 받곤 더욱더 관객을 찾아 극장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최 전 단장은 “발레를 수퍼마켓으로 만드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고급 예술의 수준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더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공연 횟수도 서서히 늘려갔다. 그가 단장을 퇴임할 때는 지방 공연도 활발히 돌며 매년 130회 이상 공연하는 살아있는 발레단이 됐다.

“무용수는 연습실이 아니라 무대에서 조명을 받고 자란다”는 게 최태지 단장의 지론이다. 그는 이번에도 비전공자 콩쿠르에서 일반인 무용수를 뽑아와 무대에 세웠다. 22년 만에 다시 토슈즈를 신었다는 전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출신 홍익대 원자승 교수를 비롯,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오는 무용수도 많다.

최 단장은 “나도 9월부터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나이가 된다. 요즘은 일흔 살이 넘은 언니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있는데, 내년엔 이 분들을 꼭 마포아트센터 무대에 세우고 싶다”며 또 밝게 웃었다. “발레가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여선 안 돼요. 열심히 연습한 일반인 무용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지면 한 사람당 100명씩은 새로운 관객을 몰고 올 겁니다. 전공자만 재미있는 작품은 스튜디오에서 하면 돼요. 티켓 사서 보러 오는 관객을 가장 무서워할 줄 알아야 발레가 더 국민 생활 속으로 스며들 수 있습니다.”

☞최태지(65)

발레 무용수, 예술행정가이자 발레 대중화의 선구자. 교토에서 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나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고국으로 건너와 1987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수석 무용수로 활동하다 1996년 37세에 최연소 단장이 됐다. 발레의 문턱을 낮춘 ‘해설이 있는 발레’, 시골, 군부대, 백화점 로비까지 ‘찾아가는 발레’ 등으로 현재 국립발레단이 누리는 대중적 인기의 초석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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