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분투하는 지각 인생들
청년들의 취업·결혼·출산 ‘3종 세트’가 늦어져 각종 사회적 파장을 낳는다는 ‘지각(遲刻) 사회’ 기획을 최근 본지 지면에 연재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적절하게 짚었다”는 반응이 있지만,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상당수 비판의 핵심은 “왜 ‘지각’이냐”는 것이다. 한 인터넷 댓글은 이랬다. “지각이란 건 정시(定時)가 있다는 얘긴데, 너무 ‘꼰대’스럽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결혼을 할 건지, 또 언제 할 건지는 자유다. 사실 출산도 선택이다. 자의든 타의든 취직이 늦을 수 있다. 돈벌이를 꼭 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살면서 흔히 듣듯, ‘내 인생 내 맘대로 사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통념을 벗어난 삶은 신선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모두 전제 조건이다. 총론(總論)일 뿐이다.
그런 총론 위에서 인생의 ‘각론’을 펼쳐내는 사람들의 고민은 좀 더 복잡했다. 30대 후반에 첫아이를 가진 40대 가장은 “부부 둘만의 신혼 생활을 충분히 가진 것은 행복했다”면서도 “육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출산이 늦어졌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일단 저질러볼걸’ 그랬다”고 말했다. 최소 60대 중반까지 자녀 교육비를 신경 써야 하는 미래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둘 다 30대 후반에야 결혼한 부부는 “직장에서 자리 잡는 시기가 늦어져 결혼이 밀렸다”며 “원래 아이 둘 낳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감지덕지”라고 했다. 마흔 살이 되는 내년에 결혼한다는 한 직장인은 “가까스로 막차를 타는 기분”이라고 했다.
이들은 스스로 ‘지각 인생’이라 불렀다. 타인이 아니라, 본인이 설정하고 꿈꿔 온 ‘정시’에 인생의 각 과제를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온전히 개인 탓은 아니다. 경제 저성장과 높은 집값 등 구조적 원인이 2030을 짓누르고 있다. 정부가 취업·결혼·출산을 당길 만한 유인책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책임을 남에게 미루는 것도 아니다. 한 31세 늦깎이 신입 사원은 “‘준비 단계’에서 지나간 수년간의 세월이 아쉽다”면서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누구보다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했다.
‘지각 사회’ 현상은 저출생과도 연결된다. 취재하며 접한 많은 사람들이 “아이 셋쯤 낳고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 게 꿈이었지만, 첫째가 늦은 데다 여건이 안 돼 이번 생(生)엔 어려울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인생의 시간표는 각자 다르고, 시대에 따라서도 변한다. 타인이 과거의 잣대로 재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 수많은 청년들이 자신이 짠 시간표보다도 훨씬 뒤떨어진 채 고생하고 있다면, 사회적인 개선책을 논의해봐야 하지 않을까. 분투하는 지각 인생들의 등 뒤로, 시원한 순풍이 불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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