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 기자의 드라마 人 a view] ‘돌풍’ 설경구
# K-정치드라마 ‘도전’
- 부패세력 청산할 권력 얻으려
- 현직 대통령 시해하는 총리 役
# 동갑 김희애와의 호흡
- 극중 싸우는 촬영마다 압도당해
- “그저 ‘혈투’…42년 아우라 대단”
# 독한 촬영, 독한 대사
- 와이어 줄 의지해 찍은 절벽신
- 주인공의 신념 극명히 드러내
- “끝까지 독하게 가는구나 생각”
최민식, 송강호 등 영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충무로의 ‘형님 배우’들이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잇따라 OTT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다. 설경구 역시 데뷔 초기 1994년에 일일 아침드라마 ‘큰 언니’이후 30년 만에 자신의 첫 드라마 주연작 ‘돌풍’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다.
최근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설경구는 이제껏 드라마 출연이 없었던 것에 대해 “전에도 ‘드라마 할 생각은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책이 좋으면 해야죠’라고 막연하게 답을 했는데 저도 모르게 벽이 있었나 보다. (드라마는) 두 번째인데 그때 하고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며 “드라마 시스템은 영화와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었는데 촬영장에서의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입견을 갖고 겁을 먹었던 것 같다”며 웃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은 세상을 뒤엎기 위해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사이의 대결을 그린 12부작 정치 드라마다. 설경구는 부패한 정치권력을 청산하기 위해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히는 국무총리 박동호 역을 맡았다. 박동호는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 대통령 선거 출마 등을 거쳐 최고 권력인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후 경제부총리 정수진을 비롯한 기성세력과 목숨을 건 정치 싸움을 벌인다. 쉴 틈 없이 사건이 이어지는 ‘돌풍’은 공개 3주 차에도 넷플릭스 ‘오늘 대한민국의 TOP10 시리즈’ 1위 자리를 지켰고, 글로벌 TOP10 시리즈(비영어) 부문에선 4위를 차지하며 K-정치 드라마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있다.
‘돌풍’의 촬영을 모두 마쳤을 때 ‘벌써 끝나?’라고 생각할 만큼 촬영하는 6개월 내내 박동호 역에 빠져 살았다는 설경구. 그에게서 정치 드라마 ‘돌풍’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돌풍’에 빠지다
설경구가 ‘돌풍’ 제작을 처음 접한 것은 제작사나 감독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영화 ‘보통의 가족’을 촬영하고 있을 때 상대역이었던 김희애의 매니저가 제안했다고. 그는 “김희애 씨 매니저가 ‘돌풍’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더라. 캐릭터도 매력 있었지만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정식으로 제작사를 통해 5화까지 대본을 받아서 읽었다. 그런데 이런 방대한 이야기를 우리 제작 환경에서 많은 대사량과 빡빡한 일정 속에서 내가 지치지 않고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선뜻 결정을 못 내렸다.”고 회상했다.
대본 자체는 너무 재미있었지만 드라마 제작 환경에 대한 선입견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던 것이다. 하지만 김희애의 강력한 추천과 대본을 쓴 박경수 작가와의 만남 끝에 출연을 결정했고, 영화 촬영처럼 편안하게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또한 친분 있는 스태프가 참여해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설경구는 “고맙게도 촬영감독이 예전에 영화 촬영팀 조수였던 친구였고, 조명감독도 전에 같이 했던 친구여서 일단 편안해졌다”고 덧붙였다.
촬영장에서 가장 힘이 돼준 인물은 역시 김희애다. 영화 ‘더 문’ ‘보통의 가족’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을 맞춘 김희애는 설경구와 동갑이지만 드라마계에서는 1980년대부터 주연으로 활동해 온 베테랑이다. 그는 “김희애 씨는 저와 나이는 같지만 연기 경력은 10년 선배다. 골프 칠 때는 좀 어리숙하기도 하고, 평상시에는 소녀 같은 모습이 있다. 그런데 촬영장에 오면 아우라가 대단했다. ‘배우 김희애’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그 힘은 어마어마했다. 그 위치가 안 변하고 있는 것도 대단하고”고 말했다.
김희애는 박동호의 상대편에 서 있는 부패 청산의 첫 번째 인물인 경제부총리 정수진 역을 맡았다. 설경구와 김희애는 사사건건 부딪치며 생존을 위한 정치 싸움을 펼친다. “극 중 싸우는 장면을 촬영할 때마다 압도됐다. 그저 혈투다. 어느 날은 촬영장에서 대사를 너무 열심히 하더라. 촬영하는 줄 알았더니 카메라 세팅도 안 된 상태였다. 그러니까 42년째 김희애로 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박동호가 되기 위한 노력
극 중 박동호는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야, 더 큰 거짓이지’라고 말한다. 존경했던 대통령을 비롯해 부패한 세력을 일거에 청산하겠다는 신념을 위해 그는 더 큰 권력을 가지고자 한다. 그렇다면 설경구가 생각하는 박동호는 어떤 인물일까? “신념을 행동에 옮기는 저돌적 모습부터 상대를 압도하는 전략가의 모습까지, 다양한 매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박동호를 단순히 권력을 욕심내는 인물이 아닌, 신념을 위해 나아가는 진짜 살아있는 인물처럼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는 “박동호는 시작부터 대통령을 시해하는 인물이지 않나. 저도 대본을 읽고 깜짝 놀랐고, 너무 현실적이지 않아서 극적 충격으로 봤다. 그는 나쁜 방법을 다 써서라도 권력이 필요했던 사람이다. 자기가 취하려는 권력이 아니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 꼭 필요한 권력이었기 때문에 불법도 저지를 수 있었던 것” 이라고 말했다. 현실 속에서는 100% 공감할 수 없지만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기합리화를 했던 것이다.
박동호의 신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정수진을 바라보며 절벽에서 떨어지는 11화 마지막 장면이다. “이전에는 대본을 빨리 줬는데 11, 12화는 오래 걸려서 나중에 받았다. 박동호의 마지막 카드가 그것일 줄은 몰랐다. ‘진짜 끝까지 독하게 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대본에 ‘정수진을 똑바로 쳐다보면서’라고 쓰여있었다.” 시청자들에게도 충격적인 이 장면은 연기하는 배우들에게도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그는 “와이어 두 줄을 매달고 촬영하는데도 겁이 나더라. ‘추락하면서 똑바로 정수진을 쳐다본다’는 그 말 자체가 너무 독해서 겁이 나도 그냥 계속 쳐다보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영화와 드라마는 촬영 시스템은 비슷하지만 대사량은 크게 차이가 난다. 특히 ‘돌풍’은 박동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설경구의 대사량은 그 어느 작품보다 많았다. 게다가 정치인, 그것도 국무총리, 대통령의 말투였기 때문에 일상적인 대사가 아니라 문어체 대사가 많았다. 그는 “이 캐릭터들은 평소에 쓰는 말이지만 내 말처럼 뱉기가 어려운 대사였다. 그러니 내일 촬영하는데 오늘 외워서는 안 될 것 같더라. 게다가 저는 이러한 대사량을 받아본 적도 없다. 그래서 처음 5부까지는 미리 다 외워서 입에 붙여놨다. 그 다음부터는 대본이 나올 때마다 매일 보면서 입에 붙게 했다. 연극할 때 계속 외우고 반복하다 보면 내 것이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을 내가 하고 있더라”고 말했다.
▮‘돌풍’에서 배운 것
작품을 마친 설경구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바로 박 작가를 만나 드라마와 캐릭터에 대해 깊이 있게 대화하지 못한 점이다. 그는 “영화는 작가분이 대본을 넘기면 손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작가와 이야기할 일이 거의 없다. 감독님과 이야기하면 되고. 대사를 수정하는 것도 촬영장에서 감독님이 써서 주시면 가능하다. 그래서 작가분이랑 소통한다는 것을 생각 못 했었다. 그런데 ‘돌풍’을 하면서 아쉬웠던 것은 대본을 쓴 분이 어떤 의도를 갖고 썼는지를 알았다면 자세한 부분에서 조금 다른 연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고 아쉬워했다.
또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 시스템은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물리적으로 찍어야 할 분량이 많기 때문에 한 번 더 테이크를 가고 싶어도 마음껏 할 수 없었던 점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설경구는 “촬영을 하고 모니터를 한 후 이번에는 이렇게 해봐야겠다고 하고 오면 세팅을 바꾸고 있어서 말을 못 하게 되더라. 방대한 양을 촬영해야 하니까 영화보다 테이크를 더 많이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올해 데뷔 32년 차인 설경구는 코로나 팬데믹에도 지난 10여 년간 쉬지 않고 작품을 해왔다.
“숙제를 해결해 보려고 버둥대는 인간이 배우라고 생각한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해결 방법이 없어지는 것 같다. 30년을 해 온 고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음엔 또 무슨 카드를 꺼내야 하나 싶다. 그럼에도 계속 숙제를 주는 것이 감사하다.”
새로운 캐릭터, 작품을 만날 때마다 늘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더 나은 연기를 보여주려는 숙명을 지닌 ‘배우 설경구’의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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