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때 책 한권 어떠세요?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일제강점기 그들의 다른 선택’(선안나, 피플파워 출판사)
‘휴가 때 이런 무겁고 진지한 책을?’이라고 아마 당신은 생각할 것이다. 제목이 주는 중압감이 있지만 그 선입견만 털어낸다면 장담하건대 이 책은 추리소설이나 연애소설만큼이나 재미있다. 주변의 청년들과 청소년들과 함께 읽으며 검증한 책이니 부디 나를 믿고 한번만 읽어보시라. 이 책은 일제강점기 항일투사와 친일파의 이야기를 분야별로 대비해 다룬다. 일테면 ‘망해가는 나라의 부자들이 사는 법’에서는 경제계 독립운동의 대부 안희제와 망국을 이용해 거부가 된 투기꾼 김갑순의 생을 나란히 보여준다. 충남 공주 감영 관노로 사또의 요강 청소를 담당했던 김갑순은 하루에도 예닐곱번 사또 방을 들락거리며 요강을 확인하고 겨울에는 사또 엉덩이가 시려울세라 놋쇠 요강을 품에 안고 따뜻하게 해서 갖다놓는다. 이 노력과 열정과 재능으로 그는 이십대에 공주 감영의 아전이 된다. 노비가 공무원이 된 것이다. 삼십대 초반에는 공주 관아에 군수가 되어 부임하고 이후 충청 제일의 땅 부자, 전국에서 손꼽히는 거부가 된다. 이 책에서 특히 재미있는 부분은 친일파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밤잠을 자지 않고 제국주의에 부역을 했는지 이 책은 꼼꼼히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은 종종 갈등하고 서성이고 변절도 하지만 친일 부역자들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자신들의 욕망을 향해 질주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 왕실의 스파이 ‘흑치마’ 배정자는 이 책을 함께 읽었던 내 동료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을 갖게 했던 인물이다. 넷플릭스의 드라마만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장마다 펼쳐지니 놓치지 마시라.
‘영원한 유산’(심윤경, 문학동네)
인생을 살면서 한 작가의 책을 세권 이상, 시리즈가 아닌 단행본으로, 읽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듯이 작가는 많고 읽고 싶은 책은 넘쳐나기 때문이다. 쓰고 나니 맞는 말은 아니다. 내 경우만 하더라도 박완서 박경리 오정희 서경식 김훈 김영하 안재성 작가의 책은 대부분 다 읽었으니 어쩌면 많은 독자들 역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은 출간되는 대로 찾아 읽는 경우가 대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가수의 음반을 사듯 말이다. 심윤경 작가 역시 신간이 나오면 챙겨 읽는 작가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던 밤을 지금도 기억한다. 낄낄대다가 울컥하다가 다시 킥킥대다가. 범상치 않은 소설이었다. 두번째는 ‘서라벌 사람들’을 읽었다. 놀랍고 경이로웠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이란 이런 것이로구나를 알게 해준 근사한 작품이었다. 경주를 여행한다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 되겠다. ‘영원한 유산’은 ‘벽수산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친일파 윤덕영이 서울 종로구에 지은 집으로, 그의 아호를 따 ‘벽수산장’이라 했고 해방 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가 사용해 ‘언커크’라 일렀던 대저택을 배경으로 흥미진진한 소설의 시간이 흐른다. 책을 다 읽었다면 근처 서촌의 박노수갤러리에 가 볼 일이다. 벽수산장은 불이 나 철거됐지만 윤덕영이 자신의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 지금은 박노수갤러리로 활용되고 있으니 시간이 되는 어느 날 서촌을 걸어볼 일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꿈꾸던 윤동주 시인의 하숙터도 근처에 있다.
‘미치지도 죽지도 않았다’(김소연, 효형출판)
미국인 여성 메리 스크랜턴이 한성부(서울) 정동에 여학교를 세웠으나 1년이 다 되도록 학생은 한명도 들어오지 않았다. 근 1년을 기다려 온 첫번째 학생은 어느 관리의 첩이었다.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고 싶은 야심 찬 꿈을 안고 온 김씨 부인을 스크랜턴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두번째 학생은 꽃님이였다. 열살쯤 된 꽃님이는 시도 때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무엇이든 훔쳤다. 조선어 교사와 김씨 부인이 꽃님이를 내보내라고 했지만 스크랜턴은 꽃님이를 끼고 살았다. 얼마 후 세번째 학생도 들어왔다. 여름 무더위와 긴 장마 속에서 콜레라가 맹렬하게 퍼질 때였다. 서대문 성벽 아래에서 다 죽어가는 여성과 버려진 여자아이 별단이를 데려와 치료했다. 몸이 회복되자 아이 어머니는 사택에서 일하고 별단이는 최연소 학생이 되었다. 1886년 정동에 세워진 최초의 여학교 학생은 첩과 가난하고 버림받은 여자아이였다. 이후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미치지도 죽지도 않고 산전수전 다사다난 전통과 근대, 제국과 식민지, 동양과 서양이 부딪히고 뒤섞이던 시기를 위풍당당 살아냈다. 최초의 여자 의사, 최초의 여자 간호사, 최초의 여자 미용사, 최초의 여자 기자 등이 되어. 이 책의 부제는 ‘파란만장 근대 여성의 삶을 바꾼 공간’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철학과 건축을 공부하고 중국에서 건축을 가르쳤던 작가가 밀도 높은 문장으로 복원해낸 시공간 속에서 청상과부, 가출 소녀, 여종, 소박데기, 구박데기를 만나 볼 일이다. 불끈, 용기가 생기리라.
‘속 깊은 무관심’(김수현, 낮은산 출판사)
‘딸로 6년, 엄마로 10년째 살아가고 있다.’ 작가 소개에 있는 문장이다. 무슨 말이지? 갸우뚱하다 불현듯 나는 딸로 32년을 살았구나, 라는 각성이 생긴다. 고작 6년만 누군가의 딸이었기에 작가가 쓰는 다음과 같은 문장은 힘을 얻는다.
‘가끔 아이들은 내 존재를 나 스스로 알아차리게 만들어. “나는 엄마 없이 못 살아.” 이런 말을 둘째가 내 목을 끌어안으면서 서슴없이 해. “엄마도 마찬가지야.”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만 사실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하지 못해. ‘아가, 엄마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단다. 뭐든 다 할 수 있게 된단다.’’
여섯 살 이후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작가는 세상에 엄마 없이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엄마 없이 자라서도 작가가 되고, 엄마 없이 자라서도 기품과 유머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엄마 없이 자라서도 유쾌한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걸 사뿐하게 보여준다. 결핍은 종종 깊은 시선, 다른 상상을 만들어낸다. 고요한 혁명이 문장마다 깃들어 있다. 일테면 이런. ‘‘낳은 정’이란 말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할퀴는 말이기도 했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의 책도 부디 놓치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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