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정치 반감···비주류·자수성가로 호감 끌어내 [유권자 움직인 '흙수저 정치인들']
어려운 유년기 정치적 자산 삼아
2030·무당층 흡수···존재감 부각
전 세계 약 40억 명이 투표소로 향하는 ‘슈퍼 선거의 해’가 전반기를 돌아선 가운데 새로운 얼굴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재력이나 명망 있는 가문, 혹은 연배를 앞세운 기존 다수 ‘정치 엘리트’들과는 달리 경제적·정치적으로 열악한 환경을 딛고 존재감을 드러낸 ‘자수성가형’ 흙수저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흙수저 정치인들의 약진은 유럽에서 두드러진다. 7월 프랑스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실질적 지도자 마린 르펜은 29세 하층민 출신 정치 신인을 중앙 무대로 세워 인기 몰이에 성공했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는 마약상이 들끓는 파리 변두리 빈민촌의 미혼모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아 프랑스 서민들의 호감을 샀다. 절제된 옷차림에 세련된 언어, 120만 팔로어를 둘 정도로 능숙하게 틱톡(숏폼)을 활용하는 바르델라는 집회마다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니며 극우당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해소했다. 주요 외신들은 “실패한 ‘엘리트 정치’에 대한 유럽 유권자들의 반발을 읽은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14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룬 영국 노동당 정부는 ‘영국 역사상 흙수저 출신 장관이 가장 많은 내각’으로 꾸려 눈길을 끌었다.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어 신임 총리에 오른 키어 스타머 총리부터가 “아버지는 공장 기술자, 어머니는 간호사”라며 자신이 노동자 계급 출신임을 강조한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다. 그의 내각은 16세에 덜컥 임신해 학교까지 중퇴한 빈민 가정 출신 앤절라 레이너를 ‘2인자’ 격인 부총리로 지명하면서 주목받았다. 구성원 대다수가 공립학교 출신이라 사립학교 장관들로 채웠던 ‘금수저’ 리시 수낵 전 총리 내각과 비교된다는 분석도 나왔다.
세습과 파벌이 판치는 일본 정계도 최근 ‘이시마루 신지’라는 인물의 부상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소도시인 히로시마현 아키타카시(市) 시장 출신인 그는 이달 7일 치러진 도쿄도지사선거에서 득표율 2위를 기록했다. 여야 대리전이자 인기 여성 정치인 간 대결로 주목받은 선거에서 무소속의 그가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 젊은 층과 무당파를 대거 흡수했다는 평가다. 시장 재임 시절 시의회에서 코를 골며 조는 의원을 질타한 일화부터 ‘정치꾼 제거가 목표’라는 당찬 포부 등도 공감을 얻었다. 살림살이 팍팍한 버스 기사의 아들로 태어나 명문대(교토대)를 거쳐 대형 은행 엘리트 금융인으로 활동한 그의 스토리도 차별화되는 감동 포인트다. 주요 언론사 출구조사의 30대 이하 득표율에서 이시마루가 당선자인 고이케 유리코 현 지사를 앞섰다는 결과가 나오자 일본 정치권은 소장파나 중견·신진을 내세운 쇄신책 마련에 돌입하기도 했다. 꿈쩍 않던 무관심 층을 흡수하고 기존 정치 거물을 위협하는 ‘표의 이동’을 눈으로 확인해서다.
주요 국가의 정치권에서 나타난 이 같은 변화에는 엘리트주의 기반의, 기성 정치를 향한 누적된 불만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연령·학력·소득 등 다양한 층위의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요구가 반영되지 않는 국정 운영에 불만을 품었고 이를 표를 통해 드러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정치학자 매튜 굿윈을 인용해 “대학과 미디어, 예술, 관료 조직 등에서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우위를 점하고 있기에 그렇지 않은 유권자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다”고 짚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주류’와는 다른 정치인에 관심을 보이며 더 나아가 지지를 보낸다는 것이다. 일본처럼 집권당의 부정과 실책, 이를 견제하지 못하는 야권의 무능함도 이런 현상의 기폭제가 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시마루 열풍에 대해 기존 주도 세력은 물론 “정치 불신을 품은 유권자의 수용을 자부해 온 반대쪽의 설 자리도 위태로워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경미 기자 kmkim@sedaily.com송주희 기자 ssong@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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