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임진왜란때 조선통신사 위조 국서·옥새 문화재 지정·전시

조현철 기자 2024. 7. 1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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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문화연구소장 김문길 부산외대 명예교수
'조선 까치 신사(鵲森宮神社)'도 건립 기려
[울산=뉴시스] 위조 국서와 도장. (사진=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울산=뉴시스] 조현철 기자 = 일본은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 번주가 위조한 조선통신사 국서와 옥새를 일본 사가현 후쿠오카 국립박물관에서 문화재로 지정·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은 16일 지난해 10월부터 1년간 전시 기간 중 이를 관람하기 위한 주민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고 밝혔다.

김 소장에 따르면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과 전쟁을 하기 위해 우선 조선과 국교를 맺도록 대마도 번주에게 명령했다.

대마도는 일본 막부에 속했으나 조선과 등을 질 수 없는 탓에 국서와 임금 옥새를 위조해 조선에 보냈으나 선조 임금은 이를 허락치 않았다.

결국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7년간의 전란은 수많은 피해를 입히고 많은 문화예술인과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심지어 전리품으로 조선인 귀와 코(귀 무덤)도 베어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마도 번주에게 조선과의 교류를 명령했다. 이에 대마도 번주는 전쟁의 아픔과 많은 문화인 쇄환(송환)을 요구하는 조선 조정 때문에 임진왜란 때 사용한 위조 국서와 옥새를 조선에 보냈다.

옥새는 본래 철로 만든 도장이다. 일본은 철로 위조하기가 쉽지 않자 나무로 도장을 새긴 뒤 위조 문서로 조선통신사를 초청했다

원래 조선에 보내는 문서는 봉서(奉書), 일본 막부에 보내는 문서는 봉복(奉復)이다. 봉서는 작은 나라에서 큰 나라 임금에게, 봉복은 큰 나라에서 작은 나라에 보내는 문서이다.

[울산=뉴시스] 조선 총독부가 대정 15년(1926년) 11월 15일 지은 '조선잡기'에 조선 까치를 잡아간 유래를 기록놨다. (사진=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일본 막부는 봉서와 봉복을 바꿔 명칭을 사용했다. 이 위조 문서에서 조선 임금이 원한 것은 전쟁에 잡혀간 조선인을 송환하기 위한 호칭으로 '회담 겸 쇄환사'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위서를 조선에 보내고 일본 막부는 요청대로 '통신사'로 위조한 도장, 위조 문서를 보내 장군취임식에 조선사절단이 참석했다. 조선은 '회담 겸 쇄신사'(포로 환국)로 초청됐다.

이밖에도 일본 막부는 축하객 '조선통신사'로 여러 차례 방문이 성사됐으나 1611년 위조 문서로 초청한 사실이 발각돼 대마도 번주 일행은 귀양살이까지 했다. 일본 교과서는 지금도 '통신사'는 '일본 조공자'라고 기록해 가르치고 있다

2017년 조선통신사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때 김 소장은 이것이 허위임을 여러 차례 얘기했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김 소장은 "지금이라도 고쳐야 한다. 위조된 도장은 장군 후손이 보관 중 수년 전에 경매에 나와 후쿠오카 국립도서관이 구입했다"며 "경매 시 사가현 나고야성 전쟁박물관에서 위조된 도장을 다시 재복사해서 이곳에도 소장하고 있다. 부산 신라대에서 강의한 나고야성 학예원 교수 히로세 유이치(廣瀨唯一) 씨는 역사를 지금이라도 바로잡자고 자주 이야기 한다"고 전했다.

위조 문서는 국립도쿄대학과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울산=뉴시스] 일본 오사까 '까치 신사' 모리 노미아에 참배객들에께 선전하는 문구. 장사 잘되는 신사, 대통하는 신사, 역사를 잘 알 수 있는 신사라고 적혀 있다. ( 사진=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한편 김 소장에 따르면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온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나베시마 나오스케(鍋島直茂)의 고향 구마모토와 사가현에선 서로 고향 출신 장군이 조선 까치를 잡아 왔다고 입씨름하고 있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33대 스이코(推古) 천황은 난바(오사카)를 통치하도록 신라 왕자(통일신라시대 가락국 김해 수로왕 자손) 기시 이하카네(吉士磐金)를 초빙했다.

김수로 자손 기시 이하카네가 부임 때 일본에 없는 까치 한 쌍을 기부했다. 길조란 것을 알고 오사카 주민들은 까치 신사(神社)를 짓고 섬겼다. 일본 열도에 까치마을, 까치강, 까치다리 등 조선 까치 이름을 붙였다.

지금도 까치 지명이 많다. 조선 까치는 기후 탓에 번식이 안돼 임진왜란 때 들여온 까치가 멸종되고 말았다. 가토와 나베시마는 전쟁 와중에도 까치잡기에 혈안이 돼 많은 까치를 잡아가서 자기 고향에 풀어 놓았다.

김 명예교수는 "조선 까치는 가토와 나베시마의 고향 구마모토와 사가현에서만 발견된다"면서 "스이코 천황 즉위 시 신라(김해)에서 조선 까치를 기증받아 번식하다가 거의 자취를 감추자 가토 장군이 전쟁 때 다시 잡아와서 가치 가라스(勝鳥)라 했다. 그런데 나베시마 고향 사가현민들은 '승리하고 돌아온 새 조선 까치는 나베시마가 잡아 와서 번식된 새'라며 주민들 간 서로 원조라며 입 다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jhc@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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