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출신 대통령이 메시아라고?
*이 글은 <돌풍> 주요 장면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종교 다른 사람이랑 사귈 수는 있어도 지지 정당 다른 사람이랑 사귀기는 힘들 것 같아.”
얼마 전 지인들과 대화하다 고개를 크게 끄덕인 대목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얼마나 ‘정치 과몰입’ 사회에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사회는 전쟁 이후 7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군사 쿠데타와 독재, 대통령 시해, 민주주의 항쟁, 국가 부도와 회생, 전쟁을 치른 국가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대통령이 있는 국가로의 변화, 대통령 자살, 시민 저항에 의한 대통령 탄핵 등 굵직한 사건만 꼽아봐도 격동의 시간을 경험했다. 사회 변동성이 강할수록 시민은 정치에 ‘과몰입’하게 된다.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그런 까닭에 한국 현대사는 정치 과몰입의 역사이기도 하다. ‘과몰입’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견인하는 역할도 하니까. 그러나 성숙할 틈도 없이, 성찰할 근력도 갖지 못한 채 비대해진 정치는 다양한 파열음과 파국을 야기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처럼.
‘권력 3부작’ 박경수 작가 신작
어느 날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이 시해된다. 범인은 장일준의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국무총리인 박동호(설경구). 대진그룹과 대통령의 또 다른 정치적 동지인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 장일준 대통령 일가가 엮인 비리를 조사하다가 보복을 당한 친구 서기태(박경찬)가 자살한 이후 자신도 보복 정치의 희생양이 될 위기에 처하자 대통령을 시해한 것이다. 물론 ‘정경유착을 끊고 재벌 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초심을 잃은 대통령과 더는 같은 시대를 공유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시해의 가장 큰 이유다. 박동호는 그렇게 돌풍을 일으켜 대진그룹과 정수진 등 소위 ‘오물’들을 쓸어버리고 사라질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서라도 권력을 손에 쥐어야 하는 정수진의 반격으로 계획은 어그러지고, 정국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돌풍에 휩싸인다. <추적자 더 체이서>(SBS), <황금의 제국>(SBS), <펀치>(SBS)로 이른바 ‘권력 3부작’을 집필한 박경수 작가의 작품답게 <돌풍>은 특유의 비유로 빚어진 명언의 향연이다. 모략과 야합과 배신이 핑퐁처럼 속도감 있게 전개돼 흥미롭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드라마가 절정(사실상 모든 장면이 ‘절정’의 연속이다)을 향해 갈수록 지루해졌다. 지루할 뿐 아니라 불편한 마음마저 든다. 이 불편함의 이유는 뭘까?
작가의 상상으로 만든 ‘픽션’이라지만, <돌풍>은 한국 사회 정치사를 압축해놓은 듯하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실제 사건이나 실존 인물이 떠오른다. 개혁적인 포부를 밝히며 당선되어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성공한 대통령이지만 아들의 비리에 휘말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변질된 대통령 장일준이나 “나를 원망하지 마라”며 바위에서 투신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박동호는 전 대통령들을 떠오르게 한다. 납북된 아버지마저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다가 결국 죽이는 ‘태극기 부대의 정신적 지주’ 신한당 대표 조상천(장광)에게서는 분단 국가의 비극성과 복잡성도 보인다.
이 밖에도 한국 사회 정치사에서 기억될 사건과 인물들이 깨알같이 배치돼 있다. 드라마의 이런 설정과 내용은 현실 정치의 후진성과 척박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거대 양당 구도에 갇힌 정치 지형에서 올곧은 정치적 지향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정파적 이익을 위한 소모적 정쟁에 희생되기 일쑤다. 정치 공작의 희생양이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여야 구분 없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으며, 내일은 다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다. ‘대의’민주주의라지만 정부와 국회가 국민을 대변하거나 대신해 일한다는 신뢰는 깨진 지 오래다. 이게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라고, 이런 정치가 시대를 망하게 하고 있다고 드라마는 힘껏 외치는 듯하다.
86세대 정치 비판적 재현
그래서 이른바 ‘모두 까기’를 시도한다. 자본으로 정치를 장악해 실질적 권력자로 군림하는 대기업, 그런 대기업과 결탁해 국민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치인, 그런 기업과 정치인을 보호하거나 정적을 제거하는 용도로 활용되는 검찰은 물론이고, 언론과 시민사회까지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민주화를 견인하고 개혁적 정부를 탄생시킨 주역인 ‘86세대’ 정치인들을 향한 비판이 핵심이다. 그 정점에는 정수진과 그의 남편 한민호(이해영)가 있다. 한민호는 전대협 의장이라는 경력을 내세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번번이 낙선하다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정치권에서 퇴출된 뒤 ‘남산 C&C’라는 사모펀드를 운영한다. 한없이 나약하고 무능한 한민호는 자신의 사업 자금 조달을 위해 대진그룹 부회장 강상운(김영민)이 의도적으로 제공한 비자금을 받아 정수진의 결정적 약점이 된다. 전대협 문화선전국장 출신으로 남편이 출마하려던 지역구에 대신 출마해 정치에 입문한 정수진은 인권변호사 출신인 대통령 장일준과 함께 한때 “공정한 나라” “정의로운 세상”을 추구하는 듯하지만, 남편을 버리지 못한 채 불의의 카르텔에 침묵하며 타락한다.
아들의 비리와 마약 투여 사실을 감추기 위한 장일준의 변질과 ‘운동권 출신’ 한민호의 몰락, 그걸 함께 짊어진 정수진의 타락은 진보 정치의 실패와 ‘패밀리 비즈니스’에 휘둘린 작금의 한국 정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또한 민주화 운동의 이력을 앞세워 권력을 갖게 됐으나 앞으로는 기득권 세력에 무능하게 끌려다니고, 뒤로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86세대’ 정치인들의 기만적 행태에 분노한 대중의 정서를 대변한다. 그래서 <돌풍>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졌느냐에 따라 시원함을 느낄 수도 있고,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는 ‘문제적 드라마’다. 시원함과 모욕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공평하다’고 느끼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다양한 반응이 가능한 이유는 이 드라마가 견지한 ‘모두 까기’ 포지션 때문이다. 드라마의 이런 면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현실 정치가 복잡한 만큼 정치 ‘드라마’도 복잡할 수밖에 없으므로. 오히려 그간 ‘성역화’된 면이 있었던 ‘86세대’ 정치를 ‘육화’시켜 비판적 재현을 했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돌풍>이 문제적인 이유는 정치적 포지션 때문이 아니다.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이 사라지다
<돌풍>은 민주화를 이루고, 정권을 교체하고, 불의한 대통령을 법적으로 심판하고, 촛불 정권이 들어서는 동안 어느덧 사회 진보의 걸림돌이 돼버린 ‘86세대’ 정치인들을 비판하느라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인 ‘국민’을 삭제한다. 극 중 박동호 세력과 정수진 세력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치열하게 정치 공작을 펼치며 서로를 죽이려 할 때 국민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사회와 언론도 마찬가지다. 도리어 언론은 박동호와 정수진이 흘린 정보를 ‘받아쓰기’ 수준으로 보도하고,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시민사회는 ‘태극기 부대’와 동급으로 취급되며 정치적 집회에 동원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이 박경수 작가가 이해한 오늘의 한국 사회일까? 이런 현실이라면 박동호가 아무리 자신을 희생해 ‘오물’들과 함께 사라져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연다 한들 무슨 희망이 있을까? 이런 정치적 파국 뒤에 열린 시대를 ‘새로운 시대’라 할 수 있을까?
<돌풍>이 문제적인 이유는 ‘내부 총질’이나 ‘부정확한 조준’ 때문이 아니다. ‘무차별 총격’으로 ‘시민’이라는 정치적 주체를 비가시화하고 우리가 지켜야 할 온당한 정치적 문제의식까지 훼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는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시민의 역량으로 불의한 정권을 교체한 2010년대 ‘촛불 항쟁’마저 정권을 찬탈하고자 음모론을 앞세워 무지한 대중을 동원한 ‘쇼’로 전락시켜버린다. 이런 무차별 총격은 정치를 소수 정치인 간의 이전투구의 장으로 오해하게 하며 오로지 음모론으로 소비하게 할 뿐이다. 나쁜 정치의 토대는 정치에 대한 무지와 냉소다. <돌풍>은 바로 이런 정서 함양에 기여하는 것 아닐까?
박경수 작가는 <돌풍>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제작발표회에서 작가는 집필 의도를 묻는 말에 “이미 낡아버린 과거가 현실을 지배하는데 미래의 씨앗은 보이지 않는 게 현재 상황이라 생각했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백마를 타고 온 초인이 답답하고 숨 막히는 세상을 쓸어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걸 구현하고 싶었다고 대답한다. 작가의 이 말에 한국 정치에 대한 환멸과 분노가 오롯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런 정서가 드라마 곳곳에 투영된다. 그러하기에 <돌풍>은 작가의 파토스가 드라마의 치명적 단점(구멍이 뚫린 것 같은 개연성 낮은 서사, 시종일관 교조적이며 과잉된 대사, 낡은 연출)을 뭉개며 내달린다. 마치 백마 탄 초인이 대중을 무시하며 내달리듯 말이다. 한국 사회와 정치를 향한 작가의 문제의식에는 많은 이가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을 삭제한 자리에 정치를 구원하고 다음 세계의 가능성을 여는 존재로 메시아의 심장을 가진 백마 탄 초인을 둔다는 설정은 시대착오적이고 심지어 해롭다.(비록 답답한 마음에 해본 상상일 뿐일 테지만.) 게다가 ‘검사’ 출신 대통령이 그 메시아 역할을 한다고?
비장해질수록 답답해
앞서 밝혔듯 한국 현대사는 정치 과몰입의 역사지만, 과몰입 상태였을 뿐 어떤 정치가 좋은 정치인지 담담하게 배울 기회를 자꾸만 놓치며 과잉 성장했다. (대의)민주주의에 관한 학습과 구현이 가능한 정치적 토대가 만들어지지 않은 사회는 초인이 달려와도 소용없다. 같은 문제만 반복될 뿐. 노무현 대통령 서거와 여러 탄핵 정국을 거치며 우리가 고통스럽게 배운 게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이 드라마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경험하고 싶은 세계가 박동호가 목숨을 던져서라도 열고 싶었던 그 세계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의 결말이 다가올수록, 배우들의 연기가 사뭇 비장해질수록 지루하고 답답해졌다. “썩어가는 세상을 어떻게 할까, 질문은 같아. 너하고 나 답이 다를 뿐.” 극 중 대사를 작가에게 돌려주고 싶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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