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으로 떠나보낸 가족들… 76년 만에 유해로 돌아온 작은형"
(제주=뉴스1) 홍수영 기자 = 제주 4·3 당시 온 가족을 잃었던 10대 소년이 머리 희끗희끗한 80대 노인이 돼 돌아왔다.
16일 오후 제주 4·3평화공원 대강당에서 열린 제23회 '제주 4·3 증언 본풀이 마당'에 참석한 이한진 씨(재미 제주도민회 뉴욕회장·87)가 자신의 아픈 가족사를 풀어냈다.
이 씨는 일제강점기 제주읍 화북리 '벌랑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씨는 배를 타던 아버지를 사고로 여의었지만, 당시 마을 훈장이던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유복한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많은 게 변하기 시작한 건 일본과 만주로 떠나 있던 큰형(고(故) 이한빈 씨)과 작은형(고 이한성 씨)이 광복 후 돌아오면서였다.
이 씨는 "만주에서 돌아온 작은형은 마을 사람들에게 한글이나 애국가를 가르치기도 했다"며 "3·1절 기념식에서 마을 사람들과 만세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형들이 돌아오면서 집안은 다시 활기를 띠었지만 이내 '4·3'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1948년 5·10선거 이후 미군의 청년 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마을 청년들은 산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이 씨의 작은형도 마찬가지였다. 토벌대에 대비해 마을마다 망을 보는 보초들이 생겼고, 어린 이 씨도 그 보조역할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청년들이 벌랑마을 바닷가에서 총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재판 절차도 없이 불법행위가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그 속에 끼어있던 작은형은 총상을 입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찰과 서북청년회는 가족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작은형을 찾아내란 것이었다. 끝없는 괴롭힘에 어머니(고 이순태 씨)까지 피신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곧 더 큰 불행이 닥쳤다.
그해 12월 눈보라 치던 어느 날 경찰에게 끌려간 어머니(당시 47세)와 작은누나(고 이연옥 씨·당시 17세)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씨는 어머니와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이 씨는 "경찰과 서청은 매일 아침이면 어머니를 끌고 갔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려보내길 반복했다"며 "집까지 불타 외갓집에 머물던 어느 날 대문 앞에서 끌려갔던 어머니와 누나는 온몸이 난도질당한 채 참혹하게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경찰의 보조단체였던 '민보단'의 화북리 부단장으로 활동했던 큰형도 '동생을 잡아 오라'는 경찰과 서청의 닦달을 못 견뎌 피신 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큰형과 작은형은 결국 경찰에 붙잡혔다. 이 씨의 큰형에겐 1949년 7월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이 언도됐다.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그는 6·25전쟁 이후 행방불명됐다. 작은형도 같은 해 7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이 씨에게 다시 작은형의 소식이 들린 건 76년이 지난 후인 올해 2월이었다. 미국에서 지내던 그에게 '제주국제공항에서 발굴된 유해가 작은형으로 확인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 세계 제주인 대회 참석 당시 채혈했던 것을 토대로 유전자 대조를 통해 해당 유해와의 가족 관계가 밝혀진 것이다.
이 씨의 두 형은 지난 2021년과 2023년 각각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씨는 4·3평화공원 내에 있는 작은형의 행방불명 표석 앞에서 무죄 판결문을 한줄 한줄 읽어가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는 이 씨는 오랜 시간 4·3을 가슴 속에 묻고 살았다. 세 살 어린 여동생과 친척 집을 전전해야 했던 그는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다. 공사장 노역 등을 하며 어렵게 야간학교를 졸업했다. 취직도 쉽지 않았다. 4·3은 그에게 낙인이 됐다.
1976년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간 뒤에도 그는 4·3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뒤늦게 아픔을 털어놓은 건 2019년이 돼서다.
이 씨는 이제 매년 12월 3일이면 미국 집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 씨의 어머니, 두 형, 누님의 제사를 한날한시에 지내는 것이다. 이 씨 손주는 "훗날 자녀가 생기면 이 일이 잊히지 않도록 얘기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gwi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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