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원 고등과학원장 "과학자 처우 개선에 집중"
"선진국으로 갈수록 '집중 투자'가 아닌 '분산 투자'를 합니다. 기초학문도 마찬가지예요.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도 이제 기초학문에 다양한 방식의 투자를 해야 합니다. 어떤 분야나 어떤 방식의 연구에서 성과가 나올지 모르거든요. 고등과학원이 기초과학연구원(IBS), 대학교 등 다채로운 기초학문 연구기관과 공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난달 4일 취임한 노태원 고등과학원장을 지난 10일 서울 동대문구 고등과학원에서 만났다. 그는 기초학문에서 학문 생태계의 다양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고등과학원이 이를 위해 제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최초의 순수이론기초과학 연구기관인 고등과학원은 국제무대에서 활약할 인재들의 양성소로 여겨진다.
1957년생인 노 원장은 "약 35년 동안 꾸준히 연구를 할 수 있었기에 연구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면서 "이제는 젊고 유능한 후배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원장직을 맡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물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노 교수는 국내 응집물리학 권위자다. 전이금속산화물과 강유전체 박막에 관한 국내외 연구 분야를 선도했다. 강유전체는 외부 전기장 없이도 전하가 한쪽으로 쏠린 분극 상태를 유지하는 물질이다.
노 원장은 실험물리학자인데 고등과학원에 이 분야를 연구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실험 경험이 고등과학원장직을 수행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냐는 질문에 그는 "몸을 부딪치며 동료들과 도전적인 과제를 해결해나가는 기쁨을 알기 때문에 이 기쁨을 많은 연구자들이 느끼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원장은 "90여 명의 제자를 키웠는데 약 50명은 박사학위를 주고 30여 명은 석사학위를 줬다"며 "이들과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를 실험하고 토론하며 풀어냈던 소중한 경험이 중요한 연구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같은 경험을 연구자들이 갖도록 적극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 원장은 박사후연구원, 방문교수격인 '고등과학원 스칼라' 등 연구원 채용을 늘려 고등과학원 규모를 키우겠다고 말했다. 또 연구원들에게 국제 학회에 참석해 세계적인 연구자들을 만날 기회를 늘리겠다고 했다. 고등과학원이 개최하는 국제 포럼 수도 늘리겠다고 했다.
1년간 고등과학원에 방문하는 외국 연구자는 8000여명에 달한다. 노 원장은 "교수가 아닌 포스닥 연구원이 중요한 연구 주제를 가져오거나 혁신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고등과학원 석학교수)도 연구원 시절 2022 필즈상을 수상하게 된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노 원장은 임기 내에 연구자의 처우를 높이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고등과학원을 세계를 선도하는 기관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노 원장은 "현재 이공계 학과 졸업생조차 교수보다는 대기업 직원이 돼 빨리 돈을 벌겠다는 분위기가 강한데 이는 과학자에 대한 처우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며 "연구원들이 외국에서 받는 처우와 한국 처우 차이를 줄여야 뛰어난 자질을 갖춘 연구자들을 데려올 수도 있다"고 밝혔다.
국가 석학인 물리학자 이기명 고등과학원 부원장이 정년 퇴임 후 8월부터 처우가 높은 중국 연구기관으로 옮겨 연구 활동을 이어간다는 소식이 최근 과학계의 큰 이슈였다. 노 원장은 "석학제도 등을 통해 고등과학원 교수들이 정년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면서도 "예산이 정해져 있는 한, 교수의 정년을 늘리면 연구원의 수나 연구원의 처우 등이 영향받을 수 있다"면서 정부, 과학계 등이 조심스럽게 정년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의견을 내기도 했다.
또 노 원장은 고등과학원의 연구원이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해서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언급하며 고등과학원이 과학계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고등과학원에서 연구원들은 교수의 연구주제와 관계 없이 자유롭게 주제를 선정하고 탐구할 수 있는 곳으로 단장 중심으로 주제를 선정하고 창의적·도전적 기초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IBS와는 성격이 다소 다르다"며 "다양한 성격의 기초연구기관이 공존해야 하는데 기초학문은 방식과 주제 등이 다양해야 발전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KAIST와의 협력을 임기 중에 늘리겠다고도 노 원장은 밝혔다. 고등과학원은 KAIST 부설기관이다. 노 원장은 "교수뿐 아니라 고등과학원과 KAIST 연구원도 두 기관을 오가며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고 KAIST 교수들이 고등과학원에서 안식년을 보낼 수 있게 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했다.
노 원장은 고등과학원이 인공지능(AI) 분야에서도 역할을 늘리길 기대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컴퓨터가 폰 노이만의 이론에서 시작한 것처럼 어떤 기술이든 기초학문이 기반이 돼 있다"면서 "AI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학문을 고등과학원이 연구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그는 훗날 고등과학원이 세계를 선도하는 기관으로 우뚝 서도록 기반 조성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최고의 기술을 만들었으면 최초의 과학 발견을 해야한다.' 과학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장인데요. 과학계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 기존의 학문을 잘 하는 것을 뛰어넘어 새로운 학문 분야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혁신적인 연구에 노벨상이 수여됩니다. 고등과학원이 혁신적인 분야를 만드는 기초연구기관으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20년 넘게 걸릴 수 있지만, 준비는 지금부터 해야합니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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