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톱을 든 체인소맨과 어퍼컷맨, 언론 절단내는 대통령
<이 주의 등장인물 소개>
-체인소맨: 악마와 거래를 통해 몸에서 전기톱(chainsaw·체인소)이 솟구쳐 나오는 능력을 얻은 인간. 히어로(영웅)인지 빌런(악당)인지 정체성은 다소 불분명
-어퍼컷맨: 장쾌한 어퍼컷 동작으로 정평이 난 대한민국의 20대 대통령
포치타는 만화 ‘체인소맨’(후지모토 타츠키, 2019∼)에 등장하는 악마의 이름입니다. 위 그림처럼 생겼죠.
전기톱 달린 새끼 돼지 같은 모습인데요. 주인공 소년 덴지는 이 녀석과 피를 나누고 한몸이 되어 슈퍼파워를 얻습니다. 가슴팍에 달린 줄을 당기면 온몸에서 전기톱이 튀어나오는 전기톱맨으로 변신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이 작품은 인간과 악마의 혈맹으로 탄생한 체인소맨이 다른 악마들을 때려눕히면서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골때리는 설정과 막나가는 전개가 일품인데, 도합 2700만부를 팔았으니 공고한 국제 팬덤을 구축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팬덤에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53)도 속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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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톱을 든 대통령, 극우의 밈이 되다
지난해 대선 기간, 밀레이는 ‘아르헨티나의 체인소맨’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유세 현장에서 전기톱을 들고 다닌 덕분입니다. 지지자에 둘러싸인 채 전기톱을 휘두르며 포효하는 그의 캠페인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모르긴 몰라도 절단 내는 것 하나는 잘하겠군.’ 아르헨티나의 체인소맨은 전기톱을 들어올리며 약속했습니다. 정부의 과도한 재정 지출 관행을 잘라내고 쓸데없이 비대한 조직 역시 파쇄하여 양극화와 인플레이션의 수렁에 빠진 아르헨티나 경제를 구해내겠다고.
사실 그가 정말 ‘체인소맨’을 읽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지자 가운데 누군가 던져준 포치타 인형을 쥐고 신나게 흔드는 영상(아래 트위터 영상 참조)이 소셜 미디어에 퍼지면서 그는 현실 정치 속 전기톱 히어로가 됐죠. 1차 선거날 투표소에는 체인소맨 코스프레를 한 유권자가 나타났고, 아르헨티나의 뉴스채널 C5N에서는 ‘체인소맨’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밀레이에 대한 정치 평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밀레이 역시 포치타와 마찬가지로 “지옥에서도 두려워하는 악마”라고요.
‘체인소맨’의 작가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일 겁니다. 자신이 낳은 캐릭터가 지구 반대편 대륙에서 극우의 상징이 됐으니까요.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신념체계를 포퓰리즘 문법에 적절하게 버무려낸 밀레이는 지난해 11월 결선투표에서 과반을 넘기면서 아르헨티나의 52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취임과 동시에 후보 시절 약속했던 대로 국가 대개조에 착수했죠. 줄을 당겨 전기톱에 시동을 걸었고, 가장 먼저 썰려 나간 희생양은 언론이었습니다.
전기톱을 든 대통령, 언론을 분쇄하다
밀레이는 정부의 미디어 광고 예산을 중단했고, 지난 3월에는 아르헨티나 최대의 국영 뉴스통신사 텔람(Télam)을 폐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명분을 들이밀었습니다.
“텔람은 지난 수십 년 동안 키르치네르주의의 선전기관으로 이용됐다.”
키르치네르주의란 48∼49대 대통령을 지낸 키르치네르 부부로 대표되는 현대 아르헨티나 좌익 이념을 말합니다. 밀레이의 정치적 반대 세력이죠. 즉, 텔람은 야권의 입장만 대변하는 편파 보도를 일삼았고, 그런 언론은 존립할 가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렇게 79년간 아르헨티나 전역에 뉴스를 공급해온 언론사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습니다. 경찰이 사옥 입구를 막았고 누리집은 먹통이 됐습니다. 직원들은 농성에 나섰으나 지난 1일 밀레이 정부는 최종 선고를 내렸습니다. 텔람의 취재·보도 기능을 없애고 정권 홍보용 선전기관으로 재편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밀레이는 과거 방송인, 정치인 시절부터 일관된 언론관을 보여 왔습니다. 국경없는기자회(RSF)는 그의 대 언론 행적을 네 가지 범주로 정리합니다.
- 공개석상에서의 반복적인 언론인 모욕
- 언론인을 향한 물리적 공격과 협박
- 언론인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
- 공영 미디어 해체 시도
이 요약이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만은 아닐 겁니다. 비판 언론을 적으로 돌려 신용을 떨어뜨리고, 대신 소셜미디어를 통해 지지자를 장악하는 전략. 이미 도널드 트럼프(미국)와 자이르 보우소나르(브라질)가 보여준 익숙한 국제 정치 트렌드이지요.
돌고 돌아, 우리 모두의 이야기
먼 길을 돌아왔습니다. 순위표를 보면서 갈무리하겠습니다.
지난 4월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2024 언론자유지수’입니다. 밀레이의 아르헨티나는 66위입니다. 전년도 40위에서 무려 26계단이나 추락했죠. 언론자유지수의 다섯 가지 세부 항목 중 정치 부문에서 20점이나 깎였습니다.
한국의 위치도 비슷합니다. 보시다시피 점수는 64.87점으로 62위, 아르헨티나보다 네 계단 높습니다. 지난해보다는 15계단 떨어졌고, 점수가 70점 밑으로 내려간 것은 처음이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한국에도 좌편향 딱지가 붙어 존폐 갈림길에 선 방송사가 있고, 정권의 의혹을 들추는 보도를 했다가 송사에 시달리는 언론인은 부지기수입니다. 시행령 한 줄에 재정 기반이 무너져 내리는 공영방송이 있는가 하면, 틱톡에 대통령 연설 짜깁기 영상을 올렸다가 경찰 조사를 받는 시민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르헨티나의 체인소맨에 견줄법한 코리안 어퍼컷맨이 있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정치가 언론의 자유를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협하는 이 현상은 초국적인 증상입니다. 다만 불행한 가정의 얼굴은 모두 다른 것처럼 한국에는 한국만의 표정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어퍼컷에 돌리는 것만으로 설명을 끝낼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 복잡다단하고 위태로운 풍경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박강수의 미디어 잔혹사는?
유튜브 댓글부터 저녁 뉴스 날씨예보까지 미디어의 영토는 광활하고 늘 논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곳에 익숙하고도 새로운 전선이 들어섰습니다. 언뜻 정치적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연루된, 자유에 관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 투쟁담을 중계해드립니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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