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규의 코칭 스토리] 김선형의 별명은 ‘맹’...맹한 김선형이 KBL 최고 가드? 최호 코치가 말하는 ‘벽’과 ‘길’
[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코칭의 시대’라고 합니다. 코칭은 스포츠에서 나왔습니다. 아마농구 10년 이상 혹은 한 팀에서 5년 이상 선수들을 지도한 코치를 찾아 코칭의 철학과 노하우를 들었습니다.
싱겁고 흐리멍덩하여 멍청한 듯하다.
‘맹하다’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김선형(서울SK)의 고등학교 시절 별명이 ‘맹’이었다고 최호 송도고 코치는 말합니다.
“하루는 시계를 거꾸로 차고 왔어요. 저는 요즘은 저렇게 차는 게 유행인가 보다 생각했죠. 그래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아’ 하면서 시계를 다시 차요(웃음).”
최 코치가 기억하는 ‘맹’과 관련한 일화는 더 있습니다. 김선형이 1학년 때 연습경기를 했습니다. 코너에서 공을 잡은 김선형은 주저 없이 슛을 던졌고, 그 모습에 3학년 선배의 기분이 상했습니다. 당시에는 좋은 기회를 선배에게 양보(?)하는 관행도 있었습니다.
선배는 김선형에게 패스를 달라고 했습니다. 김선형은 알겠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비슷한 상황에서 김선형은 다시 슛을 던졌습니다. 이 상황을 모르는 척 지켜보던 최 코치는 웃었습니다. 최 코치는 “김선형은 자기 갈 길만 본다”라고 얘기합니다.
▲ 김선형은 자기 갈 길만 본다
조금 전 선배의 말은 잊었습니다. 경기에 집중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택만 봤습니다. 김선형이 KBL을 대표하는 가드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제가 핸드폰이나 지갑을 놓고 와서 체육관을 다시 갈 때가 있어요. 다른 선수들은 없어도 김선형은 있습니다. 늦은 밤에 가도 김선형이 연습을 합니다.”
이런 선수들은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요? 최 코치는 ‘벽’과 ‘길’로 설명합니다. 벽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 울타리입니다. 그 사이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 안에서는 무엇을 해도 됩니다.
‘벽’은 선수로서의 열정, 개인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학생으로서의 본분 같은 것들입니다. 노력 없이 대가만 바라는 건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성공에는 노력이 따르고, 단체 스포츠인 농구는 때로 개인의 희생도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벽을 만들기 전에 선수의 특성 파악을 먼저 합니다. 길을 가는 것은 선수 자신입니다. 그래서 선수에 따라 길은 아주 넓을 수도 있고, 아주 좁을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잘하는 선수의 길은 넓을수록 좋습니다. 김선형의 길은 아주 넓었습니다.
“선형이 같은 아이는 굳이 제약을 안 해요. 알아서 잘하니까.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라고 합니다.”
김선형은 “부족한 것이 많아서 코치님한테 많이 배웠습니다. 순간적으로 치고 나가는 거라든지….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잘 해주셨어요”라는 말과 함께 “처음엔 친절하게 설명하다 이게 좀 반복되면 짜증을 많이 내셨죠”라며 웃었습니다.
이어서 “(선수들에게) 맞춤으로 해주셨던 것 같고, 선수에게 역할을 부여할 때도 좀 더 창의적으로 할 수 있게 해주셨다”라고 부연합니다. “벽을 뚫고 나가도 억압이나 제재가 없고, 오히려 길을 넓혀주셨다”는 것입니다.
최 코치는 김선형이 “삶의 요령도 없고 눈치도 없다”고 했습니다. 선배가 패스하라고 눈치를 줬던 1학년 때 연습경기도 그랬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김선형은 벽을 뚫고 나갔다고 했지만, 최 코치의 기준으로는 길 위에 있었습니다.
▲ 요령도 없고 눈치도 없다
그러나 그 벽이 늘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코칭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코치가 됐습니다. 현역 은퇴 후 모교에 인사를 갔다가 엉겁결에 코치가 됐습니다. 당시 송도고에 코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나보니 누군가에게는 “울타리를 잘못 만들어줬다”는 생각도 합니다. 김선형의 동기 김익호가 그랬습니다. 최 코치에 의하면 중고등학교 시절 김익호는 김선형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김선형과 김익호가 3학년 때, 송도고는 두 번 전국대회 4강에 올랐습니다. 첫 대회인 춘계연맹전에서 공동 3위에 올랐고 김선형이 미기상을 받았습니다. 쌍용기 역시 공동 3위에 올랐고 김익호는 미기상과 득점상 2관왕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최 코치는 김익호의 정신력이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는데 회피하고, 변명하고, 안 했다고 생각했어요. 선수로 만들겠다고 강하게 다그쳤습니다.”
김선형이 "짜증을 많이 내셨죠"라고 얘기했던 시기입니다. 최 코치도 짜증을 많이 냈다고 인정합니다. 선수들을 무섭게 잡았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칭찬이 더 효과적일 수 있었습니다. 칭찬과 함께 길을 넓혀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김익호의 선수 생활은 짧았습니다. 지금은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경기도 임용고시 체육 교과에서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약한 정신력으로 수석 합격은 어렵습니다. 김익호는 지금도 가끔 최 코치를 찾아옵니다. 김익호를 보는 최 코치의 마음은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합니다.
최원혁(서울SK)도 잘못 판단했던 선수입니다. 최원혁은 연계 중학교에서 안 받은 선수입니다. 농구를 계속한 것도 장신이었던 동기의 덕을 봤습니다. 최 코치는 “쟤는 농구가 안 될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키가 크고 살이 빠지면서 선수로서의 틀이 잡혔습니다. 수비와 궂은일로 선수로서의 가치를 높였습니다. 최 코치는 “수비로만 프로에 갔다”고 했습니다. 최원혁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죽기 살기로 막아보자고 생각했더니 점점 자리를 잡았다”라고 했습니다.
“최원혁도 제가 가르치고 한 것이 없어요. 그냥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울타리만 만들어놓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다 했죠.”
▲ 자기들이 알아서 다 했죠
최 코치의 스승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전규삼 할아버지입니다. 고 전규삼 할아버지는 ‘인천 농구의 대부’이자 ‘현재의 송도 농구를 일으킨 평생 농구인’으로 불립니다. 나무위키는 전규삼 코치를 ‘대한민국 체육계에서 다시 나올 수 없는 명 지도자’라고 소개합니다.
“제재를 안 하셨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괜찮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가 최 코치의 기억 속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의 그 말은 지금 최 코치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창의력이 생기는 거죠. (플레이하는데) 부담이 없는 거지. 예전에 한 언론에서 KBL 출신 학교를 조사했는데 송도고가 33명으로 1위였어요. 제가 정확하게 기억하는 게 제 등번호가 33번이었어(웃음).”
김선형의 생각도 같습니다. “저는 거의 한 200% 동의가 되는 게, 중고등학교 때 억압하고 길을 좁게 만들어놓으면 그것을 깨기가 되게 힘들어요. 대학에 오고 프로에 와보니 내가 (자유롭게 플레이했던) 이 길로 성공을 했구나”라고 회상합니다.
송도고 홈페이지는 ‘다른 학교 팀은 오직 시합에 이기기 위해서 선수의 장신화에만 중점을 두는 반면, 본교는 기초훈련에 역점을 두어 기본기를 다지는 연습을 중시하고 있다’고 농구부를 소개합니다.
송도고는 기본기를 중시합니다. 포지션 구분 없이 드리블과 슛 연습을 시켰습니다. 여기에 길 안에서는 “괜찮아.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의 코칭 철학이 더해져 많은 레전드를 배출했습니다. 송도고 선수들은 배운 것을 경기 중에 마음껏 뽐낼 수 있었습니다.
최 코치는 2003년에 송도고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코칭의 교본으로 삼아 20년 넘게 선수들을 지도했습니다. 더 좋은 성적을 요구하는 학교나 학부모의 압박도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제는 손을 놓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나빴던 것만은 아닙니다. 제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닌지, 선수를 내 스타일에만 맞추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예전에는 3점 슛 라인에서 훅슛을 던지고, 바닥에 바운드를 해서 골을 넣기도 했죠. 송도고의 그런 점이 제일 자랑스러워요.”
최 코치는 “못하니까 고등학생”이라며 웃었습니다. 제2의 김선형이 아닌 제1의 누군가가 나오길 기대하며 “괜찮아 해봐, 잘 안돼? 다시 해봐”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조원규_칼럼니스트 chowk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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