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와 하니, 영지 보며 드는 생각 "어디까지가 K팝인가?"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걸그룹 블랙핑크의 리사가 최근 발표한 솔로곡 '록스타(Rock Star)'는 K-팝일까? 뮤직비디오 버전으로 감상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가사에 한글은 단 한자도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죄다 영어다. 안무나 배경에서 한국적 색채도 전혀 느낄 수 없다. 태국어 간판이 즐비한 방콕의 거리가 배경으로 등장하고, 태국계로 보이는 아시안 댄서들이 화려한 군무를 펼친다. 오히려 영어 가사 중간에 "리사, 일본어 좀 가르쳐 줄 수 있니?" "난 대답해, 그래, 그래" 하는 내용이 살짝 귀에 거슬릴 뿐이다. 한국어도 아니고, 웬 일본어? 록스타 리사를 일본인으로 오해한다는 설정에서 나온 가사 같은데, 뭔가 좀 껄끄럽고 아쉽다. 일부 팬들은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블랙핑크는 여전히 YG엔터테인먼트 소속이고, 리사가 솔로 독립은 했다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아이돌 생활을 한 게 몇 년인데 하는 연대의식과 보상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민희진 사태'로 한창 논란이 됐던 뉴진스 멤버 하니의 일본 도쿄돔 공연 독창곡 '푸른 산호초'의 신드롬 같은 인기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이 노래는 1980년 당시 신세대 스타 마쓰다 세이코가 불러 히트한 일본 대중가요(J-팝)다. 그런데 하니가 이 곡을 너무 잘 '커버'해서 일본에서 난리가 났다. 특히 40년 전의 향수를 간직한 아저씨 팬들 사이에서 특급 화제가 됐단다. 잘 나가는 K-팝 가수가 일본 '화양연화' 시절의 히트곡을 멋들어지게 '소환'했으니 그럴밖에. 하지만 이 곡이 한국의 팬들까지 매료시켰다는 부분에선 다시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K-아이돌이 J-팝을 잘 불러서 화제를 모은 게 그렇게 '추앙'할 일인가. 개인적으론 좀 유감스럽다. 이건 마치 테일러 스위프트가 한국 공연에서 머리에 헤드폰을 쓰고 엄정화의 1999년 히트곡 '몰라'를 완벽하게 재현해서 한국팬들이 열광한 느낌이랄까. 그게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미국 팝스타에 대한 열광인지, 아니면 기막힌 '커버'에 대한 호기심인지 헷갈린다는 말이다. 차라리 안성맞춤의 선곡과 향수를 자극하는 재현으로 일본 팬들의 마음을 움직인 어도어(뉴진스 소속사)의 마케팅 능력을 칭찬하는 게 맞다.
K-팝의 위상이 날로 커지면서 벌어진 일련의 현상들은 새삼 K-팝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곱씹게 한다. 겉으로 표현되는 언어(가사)를 잣대로 분류하는 것은 더는 의미 없어 보인다. 한글이 들어 있어야 K-팝이란 주장은 부질없다는 뜻이다. 이미 국내 가수들의 신곡에도 영어 가사가 태반이다. 오히려 한글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멜론, 지니 등 국내 음악 차트에서 쟁쟁한 걸그룹을 제치고 인기순위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래퍼 이영지의 '스몰 걸(Small Girl)'을 보자. 이건 아예 100% 영어 가사다. 게다가 요즘 미국 빌보드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빌리 아일리시나 올리비아 로드리고를 연상시키는 그루브가 배어 있다. 이영지라는 이름을 빼고 들으면 그냥 새로운 팝가수인가 하고 오해할 지경이다. 아니, 그냥 '팝송' 그 자체다.
그렇다면 누가 만들고(제작자) 누가 불렀나(실연자)로 K-팝의 기준을 삼을 수 있을까? 아직은 한국의 프로듀서와 작사·작곡가들이 참여하고, 국내 레이블이 만든 앨범이 더 많다. 그러나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하이브가 세계적인 레이블과의 협업으로 합동 레이블을 설립하고, 다국적 아이돌을 육성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분류마저도 이내 의미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국어를 한국인 뺨치게 잘하는 리사는 태국인이고, 역시 영락없이 한국인처럼 보이는 하니는 베트남계 호주인이다. 더구나 요즘 아이돌 그룹 멤버 중에 외국인 하나쯤 없는 그룹은 없다. 또 방탄소년단(BTS)의 세계적인 히트곡 '다이너마이트'나 '버터'엔 외국인 작사·작곡가가 기여한 부분이 많다. SM엔터테인먼트도 오래전부터 글로벌 '송 캠프'(Song Camp)를 운영하며 다국적 작곡가를 육성해왔다. 제작이나 실연자의 경계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K-팝이라고 할만한 것은 뭐가 남을 수 있을까. 아마도 K-팝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시스템과 제작 환경, 그리고 K-솔(Soul·정서) 정도가 아닐까. 20여 년 전만 해도 K-솔의 대명사는 한(恨)과 흥(興)이었다. 트로트에 그게 가장 잘 묻어났다. 그러나 이젠 트로트 가수들도 발라드와 클래식, 록을 부르고 퓨전 무대에 오른다. 임영웅은 발라드를 지나 댄스뮤직까지 도전했다. 이찬원은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구성진 트로트를 부르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선 마이크를 잡고 프로그램을 리드한다.
이쯤 되니 굳이 K-팝을 구분해야 하나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가사가 어느 나라 말로 되어 있든, 제작자가 누구이든, 실연자의 국적이 어디이든 이제 이런 걸로 K-팝을 정의하고 한계짓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K-팝에서 K를 떼어낼 때 진정한 K-팝이 완성된다고 하지 않나. 슬슬 K가 떨어져 나갈 때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그때야말로 K-팝이 진정한 정체성을 완성하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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