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목사 방북…분단의 벽 훌쩍 넘은 대사건

한겨레 2024. 7. 16.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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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11화 유가족 활동가로 단련되던 시절
문익환 목사(왼쪽)가 1989년 4월1일 평양의 숙소를 방문한 김일성 주석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의문사 유가족 농성 135일은 내가 유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유가족들은 거리에서 경찰만 보면 이성을 잃고 흥분했다. 자식을 잃었을 때 경찰의 거짓말에 속아서 시신을 빼앗긴 유가족들도 있었다. 장례가 끝나고도 유가족들은 경찰의 감시 속에 있었다. 거리에 시위를 나가면, 방패를 들고 곤봉을 든 전경과 백골단들이 시위대를 폭행하는 걸 너무도 많이 봐야 했다. 민가협과 유가협 어머니들은 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고 했다. 특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경찰에 끌려갈 때는 민가협, 유가협 엄마들은 경찰에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1989년 ​‘유가족 만남의 집 마련을 위한 서화전’에서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박래군(왼쪽). 필자 제공

투사 유가족들 옆의 긴장하는 활동가

그러므로 나는 유가족들과 거리에만 나가면 긴장해야 했다. 감상에 빠져서는 안된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그러면 어머니들이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들 중에는 송광영 열사(1985년 경원대학교에서 학원안정법 반대,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결) 어머님 이오순 씨가 가장 전투적이었다. 어머니는 자신만의 비장의 무기를 갖고 있었다. 손가방 안에 동전 주머니를 넣고 다녔다. 그걸로 방패를 잡은 전경의 손등을 후려치면 전경들이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새끼들, 전두환 쫄개 노릇 좀 그만해!”

이오순 어머니는 경찰 무전기를 보면 잽싸게 낚아채서 땅바닥에 패대기치고는 했다. 유가족들이 흥분하면 걷잡을 수 없이 순식간에 몸싸움이 일어나고, 시위대까지 합세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988년 12월24일에는 양심수 전원 석방을 요구하는 과천 정부종합청사 농성 중에 김종태 모친과 이이동 부친이 병원에 입원하고, 몇몇 분들은 안산, 광명, 안양경찰서에서 연행되기까지 했다.

경찰로서는 거리의 무법자(?)인 민가협과 유가협이 골칫거리였다. 초로의 여성들인지라 무조건 연행해서 구속시키기도 부담스러웠다. 경찰이 택한 방법은 주로 경찰버스에 태워서 멀리 내다버리는 식이이었다. 처음에는 난지도(지금의 상암동)나 수색 정도에 내다 버렸으나, 점점 더 멀리 고양이나 미사리 같은 곳에 내다 버렸다. 어두운 밤에 버스도 끊긴 길에 한 사람씩 드문드문 내려주면 불빛도 없는 길을 걸어서 버스 있는 데까지 와서 농성장으로 돌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유가협은 1989년 3월31일부터 열흘 동안 서울 인사동 아랍미술관에서 ​‘유가족 만남의 집 마련을 위한 서화전’을 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의문사 가족 유가협 회원이 되다

어쩌다가 어머니들보다 먼저 경찰에 잡혀서 버스에 타면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들은 나와 같은 젊은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곤봉을 휘두르고, 군홧발을 날렸다. 경찰에 대들기도 했지만, 대부분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경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몸을 최대한 웅크리면서 가격당하는 몸의 부위는 최소화했다. 군대와 감옥에서부터 맞고 살아온 게 몸에 배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경찰들에 맞으면서 활동가로 단련되어 갔다.

1989년 1월15일, 농성장에서 임시총회가 열렸다. 그때의 안건은 서화전 개최의 건과 신입회원 승인의 건이었다. 유가협은 집을 만들기로 하고, 서화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의문사 농성을 맞은 것이었다. 서화전을 준비하던 분들은 불만이 많았다. 서화전을 하려면 준비할 게 많은데 회장단이 농성에 매달려 있어 진척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서화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유가족 집 만드는 건 포기하는 거냐”고 따지시는 분들도 있었다. 3월에 서화전을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그 안건은 대충 넘어갔다. 다음 안건이 문제였다.

이소선 회장은 “저분들도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의 유가족들 아입니까? 여러분들 생각은 어떻습니까?” 의문사 가족들을 유가협의 신입 회원으로 받아들이자는 제안이었다. 다수의 회원들은 찬성했지만, 반대 의견도 있었다.

“의문사 유가족이라고 다 가입하면 유가협이 뭐가 됩니까? 민주화운동 하다가 떠난 분으로 한정해야 합니다.”

한때 옥돌(분신 등으로 자결한 열사), 흑돌(국가폭력으로 사망한 열사)을 가려야 한다고 주장한 아버지였다. 그 분의 본심은 의문사를 회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손들고 의견을 말했다.

“의문사 가족들을 우리가 받지 않으면 이분들은 어디로 갑니까? 지금은 의문사이지만,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게 밝혀질 수 있습니다. 함께 해야…”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한 아버지가 성질을 못 이기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내 뺨을 후려쳐서 왼쪽 뺨에 불이 났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달려들어서 그 아버지를 떼어냈다. 그 아버지는 퇴장당했다. 소란스러웠던 논의는 박정기 부회장의 말로 정리됐다.

“다 같이 죽은 자식 끌어안고 사는 가족들인데 구분이 무에 필요합니까? 이 자리에서 함께 밥 먹고 싸우고 있으면 됐지. 저분들도 우리 유가족입니다.”

이 안건은 표결에 부쳐졌고,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그래서 유가협 안에 의문사지회가 생겼다.

1989년 2월27일, 135일간의 농성이 끝났다. 그날은 법정소란으로 구속된 오영자, 임분이 어머니가 징역 8월의 실형을 받은 날이었다. 국회에서 청문회도 무산됐다. 가해자쪽 증인들이 청문회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텔레비전 생중계도 취소됐다.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전 국민에게 의문사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의문사 가족들도 청문회 불참을 선언했다.

어찌보면 의문사 농성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이 싸움은 이후 10년 뒤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 제정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이 싸움은 수십년 동안 말도 할 수 없었던 ‘국가폭력=국가범죄’ 문제가 부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사들에게 용기를 준 일이었다.

서화전과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유가족 만남의 집 마련을 위한 서화전’은 인사동에 있는 아랍미술관에서 그해 3월31일부터 열흘 동안 성황리에 열렸다. 처음에는 조선일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미술관도 무료 대관해주고, 도록도 만들어준다고 해서 서화전을 조선일보미술관에서 하기로 했는데, 이한열 열사의 모친인 배은심 어머니가 마치 최루탄 생산 기업인 삼영화학과 화해한 것처럼 왜곡 보도한 일도 있어서 유가족들은 그 제안을 거부했다. 박정기 부회장이 책임지고 전국을 돌면서 부탁해 서화 200여점이 모였다. 김대중, 김영삼 같은 당대 정치지도자들의 글씨도 나왔다. 그 수익금으로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에 27평의 작은 한옥을 구입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 집의 안채는 세를 주었다가 나중에 돈을 모아 집 전체를 쓸 수 있게 됐다. 그러자 그 벽에 열사들, 의문사한 이들의 영정 사진을 걸었다.

서화전을 준비하던 중 유가족들은 근심이 생겼다. 평소에 유가족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던 문익환 목사가 그해 3월25일 방북을 결행하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이다. 처음 공개적으로 방북을 결행한 그 사건은 한국사회에 엄청 큰 충격을 주었다. 분단의 벽을 한 걸음에 훌쩍 넘어버린 대사건이었다.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 문익환, ‘잠꼬대 아닌 잠꼬대’ 중에서

문익환 목사가 방북을 하면서 남긴 시는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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