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중소도시에 쌓이는 악성 미분양 주택…곳곳이 전쟁터
(시사저널=길해성 시사저널e 기자)
악성 미분양 단지가 전쟁터로 변하고 있다. 사업자가 미분양 물량 해소를 위해 할인분양에 나섰는데 '제값'을 주고 분양받은 기존 입주민들이 반발하는 것이다. '할인가'에 미분양 물량을 산 입주민의 이사를 막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지금도 악성 미분양 단지가 늘어나고 있어 갈등 해결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남 광양 시내 한 아파트 단지에선 최근 기존 입주민들이 새로운 입주자의 이사를 막는 일이 벌어졌다. 입주민은 손팻말을 들고 나와 이사 트럭이 오는 단지 입구에서 "이사 반대"를 외쳤다. 진입로에 드러누워 차량 운행을 막은 한 입주민은 업무방해 혐의로 입건되기도 했다. 사업자가 미분양 해소를 위해 분양가를 낮춰 공급하자,기존 입주민들이 할인분양을 받아 입주하는 사람을 막아선 것이다.
이곳은 지난해 1월 준공한 아파트로, 1114가구 중 200여 가구가 주인을 찾지 못했다. 공급 과잉 여파로 미분양 상태가 지속되자 사업자는 자금 회수를 위해 분양가를 할인해 입주자 모집에 나섰다. 2020년 최초 분양 가격은 전용면적 84㎡ 2억9100만~3억2700만원이었다. 사업자는 미분양 물량에 대한 분양가를 2억4000만~2억7000만원까지 낮췄다. 확장비까지 무료라는 점을 감안하면 할인 폭은 최대 8000만원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할인분양을 둘러싼 갈등은 작년 10월에도 있었다. 당시 할인분양 세대가 이사 온 사실이 알려지자 입주민 단체는 △차량 1대부터 주차요금 50배 적용 △커뮤니티 및 공동시설 사용 불가 △이사 시 엘리베이터 사용료 500만원 등을 의결해 논란에 휩싸였다. 기존 입주민들은 건설사에 할인분양가 소급을 요구하거나 할인액 상당의 손해배상 등을 주장하고 있다.
제값 주고 산 입주자들, 할인분양에 '집단행동'
대구의 한 미분양 단지에선 4억원대 할인분양으로 입주자들의 반발이 거세다. 수성구 '빌리브헤리티지'는 지난해 8월 입주를 시작했지만 146가구 가운데 20%도 팔리지 않았다. 결국 남은 물량이 공매로 넘어가 기존에 비해 3억~4억원 낮은 가격에 팔리고 있다. 이에 원래 가격을 다 주고 산 기존 입주민들이 할인분양 세대의 입주를 막기 위해 아파트 내·외부에서 경계를 서고 정문을 비롯한 아파트 사방에 철조망을 설치했다. 기존 입주자들은 '계약 조건을 변경하면 기존에 체결한 계약도 동일한 조건으로 소급 적용한다'는 특약을 근거로 대금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동구 '안심호반써밋 이스텔라'에서도 미분양 물량 해소를 위해 분양가를 1억원 가까이 내려 입주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기존 입주민들 사이에선 집값 하락에 대한 우려가 크다. 10억원짜리 아파트가 40% 할인해 6억원에 분양된다면, 새로운 수분양자는 집을 7억원에만 팔아도 이득을 보게 된다. 실거래가를 기준으로 시세가 형성되는 만큼 기존 수분양자는 3억원가량 손해를 보는 셈이다. 이런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게 기존 입주민들의 입장이다.
사업자도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미분양이 장기화하면 유동성 문제는 물론 브랜드 이미지 실추로 이어질 수 있어 할인분양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사실상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지금도 지방을 중심으로 미분양 주택이 쌓이고 있어 비슷한 갈등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준공 후 미분양 주택은 지난해 7월부터 10개월째 증가세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2024년 5월 주택통계'에 따르면 지난 5월말 기준 전국 준공 후 미분양 주택은 1만3230가구로 전월 1만2968가구 대비 2.0%(262가구) 증가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20%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수도권 준공 후 미분양 주택은 2424가구로 전월 대비 1.9% 증가했으며, 지방은 1만806가구로 2.0% 늘었다.
미분양 대책 내놨지만 효과 미미…"지역 수요 파악부터"
악성 미분양 문제는 지방 중소도시에서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수도권은 상대적으로 수요가 안정적이지만 지방 중소도시는 인구 감소와 경기 침체로 인해 주택 수요가 급감하면서다. 그 결과 미분양 주택이 쌓였다. 특히 부산 지역의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은 지난해 말 882건에서 현재 1308건으로, 같은 기간 대구는 1044건에서 1506건으로, 경남은 1116건에서 1793건으로, 충북은 120건에서 205건으로 급증했다.
문제는 하반기에도 대규모 공급이 예정돼 있다는 점이다. 지방에서만 8만4647가구가 입주에 나선다. 물량이 가장 많이 풀리는 곳은 경북으로 1만972가구가 예정돼 있다. 이어 △대구 1만711가구 △충남 1만702가구 △부산 9031가구 △경남 8099가구 △대전 7122가구 순이다. 특히 대전은 2011년 하반기 이후 입주 물량이 역대 최대치다.
정부가 미분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효과는 미미하다. 대표적으로 지난 3월 도입한 미분양 CR리츠 제도가 있다. CR리츠는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가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악성 미분양 주택을 사들여 임대로 운영하다 시장 상황이 좋아지면 분양으로 전환해 수익을 내는 방식이다. 미분양 물량이 해소되지 않아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건설사들이 구제를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CR리츠가 효과를 내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악성 미분양 단지 대부분이 각 지역의 핵심 입지에서 다소 떨어진 지역에 있어서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미분양 CR리츠 도입 등은 결국 우량 사업장 중심으로 투자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며 "미분양 물량 중 시장이 회복될 때 수익성이 있어야 하는데 사업성을 갖춘 물량이 얼마나 있느냐가 관건이다"고 말했다.
악성 미분양이 심각한 지역 대부분이 공급 과잉 상태에 있는 만큼 수요 확대를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대중 서강대 일반대학원 부동산학과 교수는 "악성 미분양은 사업자에게 큰 부담이어서 자금 융통을 위해 할인분양에 나설 수밖에 없다"며 "다만 정가에 주택을 구매한 입주민들은 자산 가치 하락에 대한 불만이 클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역 내 수요 한계를 인정하고 외지의 다른 유주택자들이라도 아파트를 사줄 수 있도록 취득세 완화나 양도소득세 면제 등 대책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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