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 항암제 한우물 20년…식중독균의 놀라운 변신

화순(전남)=박정렬 기자 2024. 7. 16. 06: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민정준 화순전남대병원장 인터뷰

[이 기사에 나온 스타트업에 대한 보다 다양한 기업정보는 유니콘팩토리 빅데이터 플랫폼 '데이터랩'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민정준 화순전남대병원장(핵의학과 전문의)이 박테리아(세균)을 이용한 항암제 연구와 의사 과학자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화순전남대병원

2000년대 초반, 핵의학과 전문의인 민정준 화순전남대병원장은 식중독을 일으키는 '살모넬라균'을 연구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미국 UCLA와 스탠포드대학에서 세균·바이러스 등을 형광으로 표지해 촬영하는 '분자 영상'을 공부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살모넬라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 해당 유전자의 기능을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어느 교수의 요청에 그는 즉시 연구에 착수했다.

실험 과정에서 민 병원장은 뜻밖의 사실을 발견한다. 인위적으로 암을 유발한 쥐에게 살모넬라균을 투여하자 암 주변에 세균이 몰려간 것이다. 그는 "암이 있는 쥐에게 균을 주사한 다음 시간별로 이동 과정을 촬영했다. 1시간 동안에는 안 가더니, 다음 날 쥐를 재우고 특수 카메라로 촬영하자 균이 암 주변에 버글대더라"며 "소름이 돋을 만큼 흥분됐다"고 떠올렸다.

이전부터 의학계에서는 "매독 환자는 암에 걸리지 않는다"는 기록이 전승될 만큼 세균이 암을 제어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로 통했다. 1890년대에는 실제 암 치료에 세균이 쓰이기도 했다. 뉴욕의 외과 의사인 윌리엄 콜리는 '연쇄상구균'이란 세균을 이용해 만든 '콜리 독소'를 암에 직접 찌르거나 혈관에 투여해 암 치료에 나섰다. 세균 감염으로 환자가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등 결과가 들쭉날쭉했지만 무려 30여년을 쓰일 만큼 무시 못 할 효과를 보였다.

수술·화학 항암제·방사선이 암의 표준 치료로 정립되면서 세균을 활용한 암 치료는 서서히 잊혀갔다. 하지만 수 십년간 정복되지 않는 암을 두고 의학계는 또다시 세균, 구체적으로 세균이 촉발하는 '면역반응'으로 눈길을 돌린다. 암을 체내 면역세포가 공격할 수 있게 돕는 '면역관문억제제'(면역항암제)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부작용이 큰 화학 항암제에서 암에만 작용하는 표적항암제에 이어 3세대 항암제가 개발된 것이다.

그렇다면 암을 찾는 세균 자체를 항암제로 개발할 수 없을까? 세균이 정상 세포를 공격하지 않고 암만을 공격하게 만들면 진정한 '면역세포치료'가 가능하지 않을까? 민 병원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20년간 '박테리아(세균) 항암제'라는 한 우물을 파왔다. 그는 "세균은 면역세포를 회피하는 암을 기막히게 찾고 산소가 부족한 암 조직에서도 빠르게 증식한다"며 "여기에 면역세포를 끌어들이는 '항암제'를 탑재하면 암을 속속들이 죽이고 면역반응을 유발해 암 재발까지도 예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야말로 '항암 종합세트'가 완성되는 셈이다.

수많은 실험을 거쳐 2017년 민 병원장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중개의학'에 발표한 연구는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다. 연구팀은 식중독균인 살모넬라균을 유전자 변형을 거쳐 독성을 낮춘 뒤 암을 쫓는 '몸통'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비브리오균에서 '플라젤린B'라는 면역 유발 물질을 생산하는 유전자를 추출, 살모넬라균의 유전자에 끼워 넣었다. 면역세포를 끌어들이는 '양손'을 부착한 것.

결과는 놀라웠다. 대장암을 유발한 쥐 20마리에 살모넬라균을 주입했더니 한 달 이내에 11마리에서 암 조직이 완전히 사라져 치유율이 50%를 웃돌았다. 대장에 생긴 암뿐 아니라 간과 복부로 전이된 암까지 줄어드는 효과가 관찰됐다. 가정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민정준 화순전남대병원장(핵의학과 전문의)이 박테리아(세균)을 이용한 항암제 연구와 의사 과학자의 역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화순전남대병원

민 병원장의 '박테리아(세균) 항암제'는 기존에 항암제가 닿지 못한 '저산소성 암세포'를 다스릴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또 '선천성 면역'과 '후천성 면역'을 모두 자극해 암세포의 1차 사멸은 물론 재발 시 2차 사멸까지도 가능하다고 평가된다. 현재 민 병원장은 플라젤린B에 이어 플라젤린B와 인터루킨15라는 면역 유발 물질을 결합한 융합 단백질의 개발을 완료한 상태다. 어떤 '손'을 부착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민 병원장은 말했다. 현재 사용 중인 면역항암제와 병용하면 20~30%에 불과한 치료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민 병원장은 박테리아 항암제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2019년 '씨앤큐어'(CNCure)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현재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임상 신청을 위해 미국 위탁생산기관(CDMO)에서 GMP(의약품 제조·품질관리기준) 공정을 거친 시약을 만들고 있다. 국내에서는 영장류를 대상으로 독성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박테리아 항암제' 임상시험을 추진하는 곳은 6곳으로 씨앤큐어를 포함해 모두 임상 1상을 시작하는 단계다. 이 중에서 먹는 약(경구용)이 아닌 주사제(정맥 투여) 개발은 씨앤큐어를 포함해 2곳뿐이다. 정맥 투여 방식은 경구 투여에 비해 약물의 혈관 흡수 속도가 빠르고 적용 대상이 더 넓다는 장점이 있다.

암 치료의 '새로운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씨앤큐어는 시리즈A까지 총 128억의 투자를 유치했다. 지금도 수많은 벤처 투자자와 글로벌 제약사가 민 병원장을 만나기 위해 화순을 찾는다. 최근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 리뷰 임상 종양학'에서 창간 후 최초로 싣는 박테리아 항암제 논문을 민 병원장에게 의뢰한 사실이 알려진 후로는 협업 문의가 쇄도한다. 지난해 박테리아 항암제를 개발하는 스위스의 'T3파마'는 글로벌 제약사인 베링거인겔하임에 5억800만달러(약 7000억원)에 인수됐다.

지난달 화순군이 정부로부터 '바이오 특화단지'로 선정되면서 향후 백신·면역치료 분야의 인허가 처리, 규제 완화, 세제·예산 지원 등 다양한 혜택도 기대된다. 민 병원장은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제약사와 투자 논의도 진행 중"이라며 "박테리아 항암제는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최고의 위치를 점유할 수 있는 드문 분야다. 의사 과학자로서 한국이 면역세포치료제 분야를 선도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 강조했다.

화순(전남)=박정렬 기자 parkjr@mt.co.kr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