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인간시장' 김홍신 "南北 100년이면 타 민족처럼 돼 통일어렵다"
"통일 이루려면 국민이 정치권 신뢰해야…의원들 특권폐지 필요"
[※ 편집자 주 = 김홍신 작가의 인터뷰 기사는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7월1일 [삶] '인간 시장' 김홍신 "국회의원 연봉, 공무원 과장급 정도면 충분"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기사는 7월8일 [삶] '인간시장' 김홍신 "국회의원들 간신 되면 그 손주는 어찌 사나"라는 제목으로 각각 송고됐습니다. 네 번째는 다음주 중에 나갈 예정입니다. 원래 3차례 송고할 예정이었으나 분량이 너무 많아 4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 "남북통일은 가능하면 빨리 이뤄져야 합니다. 분단 상태로 100년이 넘으면 식생활, 문화가 바뀌고 언어도 변하기 시작해 통일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물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강국들 모두가 남북한의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가 바뀌어야 하고 북한 주민의 인식도 변해야 통일이 가능합니다."
김홍신(77) 작가는 지난달 14일과 24일 두차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남한이 지금보다 훨씬 강한 경제 대국으로 성장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되면 우리가 외교 강대국이 돼서 통일에 대한 협상력이 생기게 된다"고 했다.
충남 논산에서 성장하고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김홍신은 1981년 소설 '인간시장'이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가 되면서 유명 인사가 됐다. 그는 1981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KBS, MBC 등에서 방송 활동을 하면서 특유의 말솜씨와 유머 감각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1996년 통합민주당, 2000년 한나라당 소속으로 각각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의원 시절 8년 내내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아 '상습적 당론거부자'라는 별명이 붙었고, 매년 의정활동 1위 평가를 받았다.
[※ 편집자 주= 바로 아래 내용은 7월1일 송고한 [삶] '인간 시장' 김홍신 "국회의원 연봉, 공무원 과장급 정도면 충분", 7월8일 내보낸 [삶] '인간시장' 김홍신 "국회의원들 간신 되면 그 손주는 어찌 사나" 기사를 요약한 것입니다.]
국회의원 세비는 연간 1억5천700만원인데, 공무원 과장급 이하 정도의 월급으로 줄여도 충분하다. 월 400만원도 가능하다고 본다. 국회의원은 생계 수단이 아니라 봉사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KTX 특실, 비행기 비즈니스석, 공항 귀빈실, 공항 귀빈 주차장을 공짜로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의원회관 내 병원, 사우나, 이발관 등을 무료로 이용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국회의원 가족이 의원회관 내 병원을 무료로 이용하는 것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항공사가 국회의원에게 좌석 등급을 비즈니스에서 퍼스트 클래스로 올려주기도 하는데, 그건 100% 뇌물이다.
의원실 45평도 규모가 너무 크다. 나는 의원 시절에 의원 방과 보좌진 방 벽을 허물었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찾아와서 부당한 로비를 하는 게 불가능했다.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면책특권은 왕조 권력 같은 시절에나 필요한 것이므로 빨리 없애야 한다. 그래야 국회의원들이 정신을 차린다. 팬덤 정치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무기다. 조만간 반성과 함께 반작용이 발생할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개최하는 출판기념회는 검은돈을 받는 비리 창구다. 의원들은 출판기념회를 통해 책 몇부가 팔렸고, 돈은 얼마나 들어왔고, 그 돈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공개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자기 지역구에 지자체장과 지방의원 후보 공천을 좌지우지하면서 뇌물을 받는 일도 있는데, 이것도 말이 안 된다. 국회의원들이 1년에 두 번 해외 시찰을 나갈 때 관광 일정을 집어넣는 것도 문제다. 이들의 해외 시찰에 대한 보고서는 자세히 공개돼야 한다.
국회의원들은 각각 헌법 기관인데, 소신을 지키지 못하고 당 리더나 당 실세, 정치 팬덤에 굴복해서 왔다 갔다 하면 역사에 간신으로 기록될 것이다. 조만간 후손들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간신 행위 때문에 이 땅에서 사는 것이 괴로울 것이다.
정치권 특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 정치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국회의원 급여를 낮추고 특권을 없애면 놀라운 능력을 갖춘 각계의 인사들이 국회에 들어올 것이다.
국회의원 특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개혁 국민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 위원회에는 정당 참여를 배제해야 한다.
다음은 이번 세 번째 김홍신 작가 인터뷰의 일문일답.
-- 본인의 학창 시절에 가정 경제가 어려웠다고 하던데.
▲ 어머니가 관리하는 계가 파산한 게 3번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교 1학년 말 때쯤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아예 집을 나가셨고, 어머니는 밤 12시에 집에 왔다가 새벽 4시에 나갔다. 나와 내 동생을 위해 밥은 해놔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1학년 말 때는 더욱 어려웠다. 집과 세간살이를 모두 팔아버렸기에 두칸짜리 월세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아야 했다. 먹을 것도 없었고, 담배 살 돈도 없었다. 나는 극단적 선택을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 젊은 시절 잠시 건달 생활을 했다고 했는데, 그때가 바로 대학교 1학년 말 어려웠던 시절인가.
▲ 그때 논산의 후배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왈패 같아 보이지만 의기가 있는 후배들이었다. 논산 읍내를 장악하고 있는 정통파 건달조직 때문에 읍내에 가는 것도 힘드니 그 조직을 치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후배들의 우두머리가 됐다. 당시 논산의 건달 조직은 꽤 유명했다. 당시 논산은 '돈산'이라고 했는데, 논산훈련소 입소자들의 면회객들이 많이 오기 때문이었다.
-- 그래서 읍내 중앙의 건달 조직을 쳤나.
▲ 두 조직 간에 싸움이 붙었는데, 싸움 장소는 읍내 운동장이 아니라 외진 곳이었다. 운동장에서 싸우면 동네 사람들이 보기 때문에 싸움 장소가 될 수 없다. 싸움의 결과, 우리가 이겼다. 당시는 싸울 때 몽둥이 같은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주먹으로만 싸웠다. 당시 건달조직은 이권에 개입하지도 않았다. 그저 폼이나 잡는 의리파들이었다.
-- 변두리 조직이 읍내를 장악한 것인가.
▲ 그런 것은 아니다. 읍내에 평화가 왔다. 우리 후배들이 마음 놓고 읍내를 다닐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변두리와 중앙의 교류가 가능해진 것이다.
-- 본인은 그 생활을 왜 접었나.
▲ 내가 복학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후배들은 말렸지만, 나는 그들을 설득해서 상경했다. 나는 글로 세상을 흔들어볼 테니 나를 보내달라고 했다.
-- 몸집도 작은 문학청년이 싸움을 잘했나.
▲ 내가 싸움을 못 하지는 않았다. 몸이 워낙 빨랐기 때문이다. 나는 속칭 '깡'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도 덩치 큰 아이와 싸우게 되면 작은 낫을 신문지로 둘둘 감아서 밤에 그의 집에 찾아가서는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상대방은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신문지에 싸여 있지만 무엇인지 알기에 그냥 도망가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싸움만 하고 다녔다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 소설 '인간 시장'은 어떻게 쓰게 됐나.
▲ 1980년 계엄 상황에서 '도둑놈과 도둑님'이라는 콩트집을 출간했는데, 신군부 보안사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제목 자체가 국가 원수 모독, 체제 비방, 군 모독이라고 했다. 국가원수 모독과 체제 비방은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지만 군 모독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나를 문초한 사람은 전두환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한테 아주 심한 욕설까지 했다. 당시 나는 푹 꺼진 야전 침대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는 자세였는데, 너무 겁이 나서 몸이 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내가 풀려난 것은 당시 이종찬 국정원장, 이화여대 정치학과 김행자 교수, 동화출판공사 임인규 회장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콩트집은 모두 압수됐다. 그때 나는 소설 '인간시장'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바로 '인간시장' 집필에 들어갔나.
▲ 그건 아니다. 당시 나는 동아일보에 '서울 요철'이라는 글을 정기적으로 쓰고 있었다. 1주일에 1번씩이었다. 이 글에는 현장 취재 내용을 담았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인력시장에도 간 일이 있었다. 나는 공사 현장에 직접 가서 일해볼 생각이었으나 일꾼을 데려가는 사람은 손 검사를 하고 모자를 벗겨보더니 나는 안 된다고 했다. 일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날 인력시장에 나온 사람의 3분의 2가 나처럼 일거리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귀가 중인 어떤 사람은 호리호리하고 키가 컸다. 그 모습이 너무 안돼 보여서 사정을 물어봤다. 그는 아내가 애를 낳았는데, 젖이 안 나와서 아기가 굶고 있다고 했다. 분유를 살 돈도 없다고 하면서 울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내 버스비를 빼고 갖고 있던 모든 돈을 그에게 줬다.
-- 인력시장 외에 어떤 곳에서 현장 취재를 했나.
▲ 당시 청량리 집창촌에 간 일도 있었다. 포주한테 부탁해서 여성 1명을 사서 2시간 동안 취재를 했다. 포주가 이야기를 잘해줄 만한 사람을 골라준 것이었다. 서울역에 가서는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들을 팔아먹는 사람들도 취재했다.
-- 이런 이야기를 '인간시장'에 썼다는 건가.
▲ 이런 현장 취재 이야기를 동아일보 '서울 요철'에 담았는데, 주간한국 편집국장이 그걸 보고 나한테 연재소설을 제안했다. 주간한국 교정부에 있던 문학평론가의 주선으로 주간한국 편집국장을 만났는데, 1주일에 원고지 40매를 쓰라고 했다. 나는 자신이 없었다. 써야 할 분량도 많고, 보안사의 문초도 걱정됐기 때문이다. 나는 그 편집국장이 잠깐 다른 손님을 만나는 사이에 그냥 도망 나왔다. 그랬더니 문학 선배인 그 평론가가 "사람이 그렇게 도망가면 내 체면이 뭐가 되냐. 쓰기 싫으면 직접 국장한테 와서 말을 하라"고 했다. 나는 국장을 다시 만났다. 그분은 "쓰고 싶은 대로 써라. 내가 모든 걸 커버해주겠다"고 했다. 당시 주간한국 편집국장은 대단한 자리여서 나는 승낙을 하고 집에 왔다. 집에 오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할 수 없이 나는 논산에 내려가 후배 사무실에서 2편의 원고를 작성해 주간한국에 전달했다.
-- '인간시장'의 원래 주인공 이름은 장총찬이 아니었다고 하던데.
▲ 원래는 '권총찬'이었다. 당시 신군부 검열단이 이를 문제 삼아서 '장총찬'으로 바꿨다. 서부영화에서 배우 존 웨인이 혼자 장총 두 개를 들고 싸우는 모습이 생각났고, 논산의 고향에서 싸움을 잘하는 후배 녀석도 장씨였다.
-- 연재소설을 책으로 내면서 소설 제목도 바꿨다고 하던데.
▲ 당시 연재소설의 제목은 '인간시장'이 아니라 '22살의 자서전'이었다. 내가 '인간시장'으로 제목을 바꾸자고 했더니 행림출판사가 흔쾌히 수용했다. 내가 쓴 소설 중에는 한센병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인간시장' 제목의 단편 소설이 있었다.
-- 책이 불티나게 팔렸나.
▲ 초판은 보통 2천부를 찍을 때였는데, 행림은 5천부를 찍겠다고 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일을 한다고 했는데, 사흘 만에 연락이 왔다. 난리가 났다면서 1만부를 찍겠다고 했다. 한 달이 안 돼서 10만부가 넘게 팔렸다.
-- '인간 시장'은 지금까지 어느 정도 팔렸나.
▲ 560만부 정도가 나갔다.
-- 출판사는 돈을 많이 벌었나.
▲ 행림출판사가 마포에 큰 빌딩 하나를 지었다.
-- 본인도 돈을 벌었나.
▲ 10만부 돌파할 때 출판사는 현대의 '포니2'라는 승용차를 사줬고, 100만부 넘으니 현대의 중형차인 '스텔라'를 선물로 줬다. 300만부를 돌파하니 대우의 '로얄살롱'을 줬다.
-- 인세를 줘야지 왜 자꾸 승용차를 주나.
▲ 인세와는 별도로 보너스를 준 것이다. 행림은 원래는 한방 서적을 내는 출판사인데, 내 소설을 출간해줬으니 나로서는 고맙다.
-- 이 소설이 히트할 것으로 예상했었나.
▲ 주간한국에 연재할 때도, 책으로 나올 때도 이 정도로 반응이 뜨거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주간한국 편집국장이 원고를 들고 온 나를 보면 "독자들이 난리가 났다"고 했지만 '몇만부 정도 팔렸겠지' 정도로 생각했다.
-- '인간시장'이 히트한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광주항쟁을 시작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에 대한 울분이 사람들에게 쌓여 있었는데, 이 소설이 그걸 터트려 준 것이라고 본다. 당시 평론가들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 이 책은 금서가 되기도 했다고 하던데.
▲ 신군부가 대학가, 군부대, 구로공단, 해외 근로 현장 등에서는 팔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도 잘 팔렸다. 가짜 김홍신, 가짜 장총찬이 나타나서 여성을 농락하는 일도 꽤 있었다. 어떤 여성분은 우리 집에 와서 내 얼굴을 보더니 자기가 사귀던 사람이 김홍신이 아닌 걸 알고 울었다. 어떤 여성은 매일 우리 집에 전화해서 자기가 전생에 김홍신의 부인이라고 주장했다. 매일 전화하고 우리 집에 선물을 보내왔다. 결국 아내가 그 여자를 만나 밥을 사주며 달래줘야 했다. '인간시장'에서 권력자들을 수없이 비판하니 우리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불안해진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방으로 피신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이런 마음고생을 시킨 게 미안하다.
-- 작년에 출간한 소설 '죽어 나간 시간을 위한 애도'는 어떻게 쓰게 됐나.
▲ 내가 ROTC(학군사관후보생) 장교로 전방에 근무할 때 직접 경험한 일을 담았다. 1971년 7월 1일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전날이었다. 심야에 북한군 3명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잠수 상태로 내려오다 2명은 사살됐고 1명은 달아났다. 우리가 확인한 사체는 1구였다. 숨진 군인은 등에 폭탄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그 폭탄 3개를 터트리면 면 소재지 하나는 날릴 수 있을 정도의 폭발력이라고 했다. 북한군 2명이 먼저 내려왔고, 뒤에 있는 북한 군 1명은 앞사람들과 연결한 빨랫줄을 자기 허리에 감고 있다가 앞 사람들이 성공하면 따라 내려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앞의 두사람이 사살되니 뒤에 있는 군인은 빨랫줄을 당겨서 1구의 시체를 갖고는 도주했다. 남아있는 북한군 시신 1구는 부대 옆에 가마니로 덮여 있었다. 군의관이 시검을 해야 하고 군검찰이 사인을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검으로 나무를 깎아서 십자가를 만들어 그 앞에 꽂아놓고 기도했다. 이 행위 때문에 나는 보안사 조사를 받았다.
-- 보안사에 가서는 뭐라고 이야기했나.
▲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영화나 소설을 보면 적장이 죽었을 때 모자를 벗거나 경례한다. 사람이 죽으면 흙인데 흙을 미워할 필요가 있나"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보안사 장교는 "빨갱이 새끼"라고 몰아붙였다. 다행히 나는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남한산성의 육군 형무소에 갇혀 고초를 겪는 내용으로 각색했다.
-- 이런 비극이 사라지려면 빨리 통일돼야 하는데.
▲ 통일은 가능하면 빨리 와야 한다. 민족이 갈라진 상태에서 100년이 넘으면 민족의 정기가 달라지고 식생활, 문화도 바뀐다.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언어도 변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통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한 민족이 100년 이상 갈라져 있다가 통일이 되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옛날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통일을 이루려면 정치인들이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국회의원들이 특권을 버리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 한국 주변의 나라들이 남북통일을 원할까,
▲ 현재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 모두가 남북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본다. 통일 한국이 자신들의 안보 전략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이 되려면 국제 정세가 변해야 하고, 북한 주민들도 바뀌어야 한다.
-- 경제력도 통일에 중요한 변수인가.
▲ 지금도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 차이가 크다. 한국이 90이라면 북한은 10도 안 될 것이다. 핵을 제외한 무기 체계는 99대 1로 북한이 열세라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훨씬 강한 경제 대국이 된다면 통일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고 본다. 경제 대국이 되면 우리가 북한을 도울 수 있고, 외교 강대국이 될 수 있기에 국제사회에서 협상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 남한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남북한 모두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 돌발적인 상황에서 실수라도 하면 문제가 크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야 하고, 빨리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
-- 본인이 쓴 시집 「한잎의 사랑」을 보면 '사랑은 무죄'라는 제목의 시에서 "앞으로 1년은 살 수 있을까. 핏줄이 죄다 일어서는 말 한마디. 그리고 오열하는 여행의 천국"이라는 시구가 있는데.
▲ 이 시집은 나의 아내와 관련된 시를 모은 것이다. 아내는 살아 있을 때 1년만 더 살아도 좋겠다고 했다. 아내가 유언을 남기지는 못했다. 갑자기 숨을 못 쉬니 목에다 호스를 넣어 조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2004년 3월20일 병원에서 연락이 왔고, 아내는 하늘나라로 갔다. 아내가 49세 때였다. 영정사진은 1년 6개월 전에 준비했다. 병원 측은 얼마 못 산다고 해서 영정 사진을 준비하려 하니 사진이 없었다. 다만 내가 국회의원 시절에 후원회를 열었는데, 그때 가족석에 앉아 있는 아내를 멀리서 찍은 사진이 하나 있었다. 나는 사진 전문가한테 부탁해서 고성능 카메라로 그걸 찍어서는 확대했다. 나는 그걸 영정사진으로 만들어 놓고는 아이들이 볼까 봐 이불장 맨 뒤에 숨겨놓았다. 나는 그 사진을 그곳에 둔 사실을 잊을까 봐 두려워 가끔 그걸 꺼내 보고서는 다시 집어놓곤 했다. 병상에서 마지막 순간 딸아이는 엄마를 끌어안고 "다음에는 아프지 마"라고 했다.
-- 아내는 어떻게 만났나.
▲ 아내는 대학 시절 내가 지냈던 하숙집에 언니와 함께 하숙하는 여고생이었다. 그 여고생은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나는 대학생이고 아내는 아직 고등학생이니 당시에 내가 그 여고생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가끔 하숙집에 왔을 때 그 여고생을 이쁘게 봤다. 그 여고생은 당시에도 몸이 아팠다. 천식이 있었고 체력과 면역력도 약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어머니가 면회를 왔는데, 그 여고생을 데리고 왔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뜻을 알게 됐다. 어머니는 본인의 몸이 안 좋으니 몸이 아픈 아내에게 마음이 간 듯했다. 동병상련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픈 사람을 보면 잘 도와주는 스타일이었다. 시골에서 백 가지 약초를 오래 고아서 조청처럼 만들어 놓고는 이걸 아픈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분이었다.
-- 아내의 천식은 치료가 안 됐나.
▲ 아내는 몸이 안 좋아서 고생을 많이 했다. 사람이 천식으로 숨을 못 쉬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눕지를 못하고 잠도 못 이룬다. 아내 이야기를 계속하면 내가 힘이 드니 그만했으면 한다.
-- 139번째 신간 '겪어보면 안다'를 최근에 냈는데,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 몇 년 전에 '겪어 보면 안다'라는 시를 방송에서 낭송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이 제목으로 그동안 써놨던 수필을 묶었다. 지난 6월이 김홍신 논산 문학관 개관 5주년인데, 여름은 너무 더우니 9월 28일에 행사를 열기로 했다. 이때 이 책을 나눠주자는 생각으로 출간했다. 내가 '글쟁이'이니 책을 선물해야 하지 않겠는가?. 논산 문학관 5주년 행사에는 법륜스님이 오셔서 '즉문즉설'을 해주시기로 했다.
-- 이 책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나.
▲ 사람은 몸이 아프기도 하고, 근심하고, 분노하고, 갈등을 겪기도 한다. 이는 사람이 살아 있기에 생기는 일이다. 이런 고통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다. 이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고통을 줄일 수 있다. 이런 등짐은 벗어 던지려 하지 말고 살살 달래서 함께 가야 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140번째 책은 언제 나오나.
▲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중편소설과 단편소설들을 묶어서 책을 낼 예정이다. 내년에는 시집과 동화책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취재지원 이은도 김연수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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