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악녀’서 암 환자에 용기 준 희망의 아이콘
10대에 ‘책받침 여신’으로 등극했다가 20대에 할리우드의 악녀로 몰락한 뒤 한물간 스타로 30대를 보낸 이 배우는 40대에 불굴과 희망의 아이콘으로 부활했고, 50대에 하늘의 별이 됐다. 암과 싸워온 미국 배우 섀넌 도허티(53)가 13일 별세했다는 소식에 미 언론들은 한 편의 영화 같았던 그의 인생을 조명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피격 관련 뉴스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 등 주류 언론들이 장문의 부음 기사를 냈다. 배우로 대성하진 못했지만, TV 드라마와 팟캐스트 등으로 암 투병 사실을 담담하게 공개하며 삶의 가치를 보여준 용기를 기렸다.
1971년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부동산 중개업자의 딸로 태어난 도허티는 가족과 함께 대중문화 중심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똘망똘망한 얼굴과 맑은 목소리, 능숙한 연기력으로 방송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열한 살에 가족 드라마 ‘초원의 집’에 캐스팅됐다. 한국에서도 더빙판으로 방송돼 큰 인기를 끌었던 이 드라마의 마지막 시즌에서 도허티는 여주인공 부부의 조카딸 ‘제니 와일더’ 역할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도허티는 1990년 처음 방송된 청춘 드라마 ‘베벌리 힐스 아이들(원제 베벌리 힐스 90210)’에서 주인공인 당찬 여고생 브렌다 월시 역을 맡아 당대 최고 하이틴 스타가 됐다. ‘베벌리힐스 아이들’은 캘리포니아의 부촌을 배경으로 고교생들의 세련되고 개방적인 일상을 감각적으로 그려 오렌지족과 X세대 열풍이 몰아치던 한국에서도 인기몰이를 했다. 당시 지상파 TV로 볼 수 있었던 주한 미군 방송 AFKN의 방영 시각에 맞춰 시청자들이 모여들 정도로 화제가 되자 MBC TV가 정식으로 수입해 더빙판으로 방영했다.
지금은 환갑 전후의 나이인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브룩 실즈 등이 1980년대를 풍미했던 ‘1세대 책받침 여신’이라면 섀넌 도허티는 비슷한 연배의 얼리사 밀라노, 위노나 라이더 등과 ‘2세대 책받침 여신’으로 꼽혔다. 베벌리힐스 아이들의 인기에 힘입어 1995년엔 소피 마르소가 맡았던 국내 유명 화장품 브랜드 전속 모델 자리를 이어받았다. 하지만 이후의 연예인 경력은 내리막길이었다. 1993년 남자 친구를 총으로 위협한 혐의로 접근 금지 명령을 받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미지가 실추됐고, 방송 스태프 및 동료 배우들과 불화설이 불거지더니 ‘베벌리힐스 아이들’에서도 중도 하차했다. 이후에도 음주와 폭력 등 불미스러운 사생활 관련 소식이 꼬리를 물었다.
여러 작품에서 연기 변신과 이미지 회복을 시도했지만 변변한 히트작을 내지 못했다. 세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등 개인사도 평탄치 않았다. 이 때문에 도허티는 ‘나 홀로 집에’의 매컬리 컬킨(44)과 함께 몰락한 아역 스타의 대표 사례로 꼽히곤 했다. 생의 반전은 40대 들어서 찾아왔다. 마흔네 살이던 2015년 인터뷰에서 유방암 진단 사실을 알렸다. 수척한 맨얼굴이 담긴 사진과 동영상을 소셜 미디어에 알리면서 투병 소식과 근황을 전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소통하는 도허티의 모습에 과거의 안티 팬들도 원군이 됐다. 2017년 항암 치료차 머리를 깎을 때는 친구와 동료들이 동반 삭발을 했다.
암 진단 뒤 몸 상태가 잠시 좋아졌지만 2020년에는 4기 진단을 받았고, 지난해에는 뇌와 뼈까지 전이됐다. 이런 가운데서도 2021년에는 암을 앓는 어머니가 오래전 입양 보낸 딸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내 인생의 리스트’에 출연했다. 그의 활동은 암환자들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릴 여건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던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긍정과 희망의 아이콘으로 사랑받게 된 그는 작년 11월부터는 애플 팟캐스트 ‘확실히 합시다:섀넌 도허티와 함께’를 진행하면서 과거 출연작과 동료 배우들에 대한 얘기, 암환자로 겪는 치료 경험 등 일상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지난 8일 녹음분이 그의 마지막 방송 출연이 됐다. ‘베벌리힐스 아이들’에서 도허티의 쌍둥이 남매로 공동 주연을 맡았던 배우 제이슨 프리슬리는 인스타그램에 “그녀는 대자연의 힘(force of nature)이었다”며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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