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남해 농부 이야기
저녁 강의차 남해에 들른 날, 오후 늦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걷지 못하는 나의 남해 구경을 위해 기꺼이 자기 시간을 내준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새하얀 농사용 트럭에 태웠다. 밭일하던 트럭이 더러워 서울 손님 편하게 모시려고 열심히 청소했다는 깨끗한 차를 타고 초면인 우리는 영문 모를 남해 드라이브에 나섰다.
“오늘 어느 도로에서 몸이 불편하신 분을 만났어요. 걷고 듣는 게 모두 불편한 분 같았는데, 제 차를 세우고 무어라 말하시더라고요. 알아듣지 못한 나머지 글로 대화하니까 차 좀 태워달라고. 바로 모셨죠. 목적지에 도착하니, 그분이 1만5000원을 주시대요. 안 받겠다 했더니 1만원을. 또 안 받겠다 했더니 5000원을. 결국 5000원 받고 말았어요.”
“일찍부터 고생이 많았네요.” 서울이면 이렇게 말했겠지만, 처음 만난 시골 사람의 맥락 없는 선행은 어떻게 반응하는 게 적절한 예의일지 몰라 “잘하셨네요” 하곤 자동차 룸미러 아래 흔들리는 세월호 리본을 따라 무안한 두 눈을 끔벅였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내 얼굴을 흘깃하더니 이어 말했다. “선생님 친구는 아니겠죠? 장애인을 많이 못 봐 혹시 친구이실까 했어요.” 나는 답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대신 감사하네요. 장애인이 오가기 힘든 차편 때문에. 이 트럭 못 만났다면 어찌 이동하셨을까 싶어요.” 길 잃은 행인 사정은 내 사정이기도 했다. 남해의 이동권은 적막한 산세만큼 아득했다.
농부는 남해에서의 삶을 소개했다. “남해는 참 시원하고 멋진 곳이에요. 저는 여기 사람이에요. 제 누이도, 형제도 다 남해를 떠났지만 저는 남았어요. 자본만 바라보는 삶보다 더 좋아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고 힘들면 술 마시고. 돈을 위해 산다는 건 그런 일뿐이었어요. 그렇게 오래 살다가 삶이 너무 허망하다 느끼고 내려왔어요.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서 나이 예순 다 돼서도 아직 마을 막내예요. 동네에서 마늘도 키우고, 옥수수도 키우고, 어르신들 일도 돕고. 우리 아이들도 숨 막히는 도시 대신 여기서 자랐으면 좋겠는데 일자리가 없네요. 요즘 애들은 농사가 낯설어 어려울 텐데.”
낯선 사람들을 용기 있게 돕는 게 익숙한 따뜻한 농부는 10만 넘던 인구가 4만 이하로 축소된 남해의 소멸 위기를 말할 때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다 그는 해병대 복무의 추억을 소개하며, 요즘 새벽마다 읍내 사거리에서 자신의 까마득한 후임 채 상병의 순직 진상규명을 외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 때문에 자기는 이 작은 읍의 ‘위험인물’로 여겨진다고. 하하 웃으며 말하는 그의 소개에 미소 지으면서도 서로서로 다 아는 시골에서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지 생각했다.
사람 떠난 바다와 산이 끝없이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남해 농부는 이 소외된 마을에서 인정받기 힘든 삶을 살면서 좌절하지 않는지를. 홀로 버스 없는 거리의 장애인을 모시고, 일자리 없는 도시의 미래를 생각하고, 정치 없는 읍내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서울 사람들이 응당 머잖아 소멸하리라 넘겨짚고 마는 그 섬의 작은 농부는 어떻게든 터전을 지키고자 이동권, 일자리, 민주주의의 공백을 스스로 채우고 있었다. 온몸으로.
변재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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