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호국’과 ‘민주’의 정치학
지난 6월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달이며 동시에 ‘호국 보훈’의 달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는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군부독재 시대에 호국이 민주를 거의 압사시켰던 기억이 생생해서 그렇기도 하다. 지금도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존재한다.
‘호국’이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어떤 도전도 허락하지 않는 성역이었고 그 개념에 문제 제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호국’은 그것이 정권 안보와 중첩되어 있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도 그렇다. 대통령, 당대표, 국회의원 등에 당선되면 그다음 날 당선자는 ‘호국’의 상징인 국립현충원을 가장 먼저 찾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물론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보훈’의 내용이 충실해졌다(내게는 일단 ‘호국’ 하면 1970년대, 1980년대에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교련과 모의 수류탄 던지기 등의 훈련을 통하여 사회를 군사주의로 포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또한 준군사조직으로 전락한 ‘학도호국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6월을 맞이하여 정부는 지난 2일 ‘2024년 호국보훈의달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국무총리의 이름으로 담화문이 공개되었지만, 사실은 현 정부의 메시지라고 봐도 될 것이다. 일단 내용을 떠나서 이런 식의 발표문이란 국민을 향해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냥 ‘국민께 드리는 글’이라고 하면 안 되는가? 이런 전형적인 관료 권위주의적인 ‘담화문’ 형식은 그 자체로 내용을 결정하기도 한다.
이번 담화문은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신 순국선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산화하신 호국영령, 민주주의를 꽃피우신 민주열사의 헌신이 있었습니다”라고 한 후 ‘산업화의 주역’과 제복을 입으신 분들(국군장병, 경찰관, 소방관 등)을 추가한다. 그리고 “이분들의 위대한 희생과 헌신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상식적인 결론을 내린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우선 ‘호국’은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는 뜻인데 좀 따져보자면 ‘민주열사’는 왜 서울과 대전에 있는 국립현충원과 여섯 개 지역에 있는 호국원에서 찾아볼 수 없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원했던 것은 제대로 된 나라 만들기 아니었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호국’의 일부다. 원래 ‘호국영령’은 6·25 전쟁 및 군사적 충돌에서 사망한 군인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그 의미는 계속 확장되어왔다.
국가로부터 보상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민주 투사’들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억울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그 길이 국가가 모든 것을 수렴하려는 국가주의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이의 유족이 만약 국립묘지를 원한다면 최소한 국가가 관장하고 운영하는 시설에 모셔야 하는 것 아닌가? 민주열사 상당수는 남양주시(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민간 시설이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했던 사람들은 국립현충원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있다. 4·19 국립묘지, 5·18 국립묘지를 제외하면 모두 사설이다.
게다가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에는 능동적인 친일파(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자와 부역자) 무려 60여명이 여기저기에 묻혀 있다. 이들도 시민들이 소중한 세금으로 마련한 자리에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와 함께 잠들고 있다. 좀 기이하지 않은가?
올해의 ‘대국민 담화문’은 “정부는 최고의 예우를 다해 나라와 국민을 위한 희생과 헌신에 보답”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또한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실현하겠습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민주 유공자를 현충원 등에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내 얘기는 국립시설에 꼭 안장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일종의 선택권을 유가족 등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 ‘옵션’이 없다.
추모하는 마음과 함께 물리적 시설이 중요하다. 덧붙여 나라와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희생당한 이들을 기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현충원이나 유사 시설도 결국은 전쟁과 영웅을 찬양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올리브 스톤이 감독한 영화 <하늘과 땅>에서 주인공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이 남기는 것은 묘지들이야. 거기에는 적도 아군도 없지.”
권혁범 대전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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