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史淵]새로운 기념 하기
1907년 8월1일은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
강제로 해산하자
여기에 순응하지 않은
시위보병 2개 대대가
일본군과 시가전 벌인 날
이후 광복군 제2지대서
광복군 역사 정리하며
‘독립전쟁기념일’로 간주
1917년 7월4일 발표된
대동단결선언은
제국서 민국으로 전환을
명확히 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 내세우게 했고
대한제국과 독립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연결되는 근거를 제공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해 특정 날을 지정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흔히 특정한 그날을 무슨 기념일이라고 말한다. 개인 차원의 생일과 국가 차원의 국경일이 단적인 보기일 것이다.
기념하기란?
기념일에는 대부분 기념행사를 한다. 그래야 의미를 되새기고 기억력을 유지하거나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념일의 기념행사는 1년에 한 차례씩 돌아온다. 그래서 364일의 긴 공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메워주는 존재의 하나가 기념관이다. 특히 사회나 국가 단위에서 기억의 끈을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념관이 필요하다. 기념관은 기념하려는 대상에 대해 다양하고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기억을 더 촘촘하고 끈끈하게 강화하는 최전선이다. 또 약해지는 기억력을 저지하고 망각에 맞서는 최후의 거점이다.
기념하는 날짜와 그날의 의미는 기념관과 기념행사의 형식과 내용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달리 말하면 기념일의 확정은 기념하기에서 가장 우선해야 한다. 기념할 만한 대상을 상정하고 그 의미를 분명히 해야 날짜를 특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기념일은 누군가를 설득하고 공유할 만한 그날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단순 명쾌하여 그날을 특권화하기 쉬운 예도 있다. 7월17일 제헌절처럼 인물, 사건, 단체 등과 직접 연관이 있어 특정 날짜를 확정하기 쉬운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는 사실에 오류가 없다면 기억갈등이 일어나기 쉽지 않지만, 오류가 있다면 기념일을 바꿀 수밖에 없다. 정부가 2019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13일에서 4월11일로 변경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일단 합의된 기념일은 매년 반복하는 기념행사와 항상 존재하는 기념관을 매개로 특권적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고 특권적 지위가 언제까지나 안정적이지는 않다. 모든 집단기억에는 복수(複數)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공존하며 경쟁한다. 설령 더 설득력 있고 힘을 동반한 이야기로 합의했다 하더라도 봉인된 또 다른 기억이 어떤 계기로 분출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기념일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거나 새로운 날짜를 취급하는 독립된 요구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3·1운동 대신 ‘3·1혁명’으로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든지, 5월1일을 근로자의날 대신 ‘노동절’로 부르며 기념행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기념일의 의미를 둘러싼 경쟁은 집단의 정체성에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더구나 가치의 상대화가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정체성의 불안정함은 더욱 잘 드러난다. 사회의 공동선(善)을 훼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의 흐름도 이 불안정함을 촉진하고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뭔가를 기념하는 행위는 인간의 귀속의식의 심지(心地)를 깊게 하며 규칙성을 찾으려는 내적 욕구를 채워준다. 현대 사회 특징의 하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대부분 한국인에게 보통의 하루인 지나간 7월4일과 다가올 8월1일에 대한 나의 욕구도 여기에 해당한다.
8·1 독립전쟁기념일
8월1일에 ‘1907년’이란 연도를 함께 제시하면, 이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한국인은 있을 것이다. 1만5000여명의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에 저항할 물리력이 없어진 날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군사비를 아껴 후생비로 사용하고 군사제도를 쇄신하며 사관(士官)을 배양하는 데 주력하겠다고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것 하나 실행한 적이 없었다. 한국인의 저항을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순응하지 않은 시위보병 2개 대대는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각지의 진위대(鎭衛隊) 관병들도 의병운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공립협회는 군대가 해산된 직후 우리의 항일운동을 ‘독립전쟁’이라 이름 붙였다. 이들은 미국인의 반(反)영국 식민지 해방전쟁을 독립전쟁이라 보고 우리의 항일운동에도 적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해산 군인들에게 호소하였다. 대한제국 군대의 강약을 묻지 말고 왜적의 노예가 되지 않게 ‘대한독립’을 찾고자 독립전쟁을 시작하자고(공립신보 1907·8·9). 역사적 연원이 있는 독립전쟁이란 말로 항일운동의 기본 프레임을 제시한 것이다.
이후 민족주의운동 세력, 특히 해외의 민족주의운동 단체는 자신들의 행위를 독립전쟁이란 이름으로 설명했다. 중국 시안(西安)에 있던 한국광복군 제2지대도 1943년 광복군의 역사를 정리하며 ‘8월1일을 한국독립전쟁기념일’로 간주하였다. 이날이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탄생한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광복군 대원들의 의식 속에는 의병-독립군-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계승성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7·4 민권의날
한편, 사람들이 8월1일보다 더 자각하지 못하는 날이 있다. 7월4일이다. ‘1917년’이란 연도를 붙여도 그럴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이 1917년 7월에 발표되었다고 아는 사람조차 그럴 것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다.
1986년 8월 선언문의 실물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선언문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큰딸인 안수산 여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유품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이즈음 1982년에 일어난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검정을 둘러싼 역사왜곡 파동을 계기로 독립기념관이 천안에 건립 중이었다. 도산 선생의 유품도 전시 준비의 하나로 독립기념관에 보내졌는데, 그것을 분류 정리하다 말로만 전해져 오던 선언문이 발견되었다(경향신문 1986·8·15). 거기에는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등 14명의 찬동자 이름도 있었다. 69년 만인 이때서야 선언의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내용이 학교교육을 통해 국민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도 검정 교과서인 ‘한국근·현대사’로 수업을 시작한 때인 2003년이었다.
그런데 선언문의 실물에도 선언 날짜가 없다. 1917년 7월로만 나온다. 선언문이 만들어진 날짜를 명시한 글도 소개된 적이 없다. 하지만 찾아보니 이 날짜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있었다. 상하이 한국독립당의 공식 기관지로 1934년에 간행된 <진광(震光)>이 바로 그것이다.
중문판 <진광> 제2·3호에는 애국 의사들의 순국 일지 등을 연표 형식으로 정리한 ‘역연 의사 월력표(歷年 義士 月曆表)’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연표 형식인 기사의 7월 부분을 보면 ‘4일 대동단결선언’이란 언급이 있다. 나는 선언문과 관련한 날짜의 명시적 언급은 이 기사에서 처음 보았다. 기사가 수록된 중문판 <진광>의 제작 책임자는 조소앙이다. 그는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사람이자 찬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결국 선언문의 당사자인 조소앙이 17년 전의 일을 기억해 내고 자신이 제작을 맡고 있는 잡지의 기사에 4일이라고 명시하여 기록으로 남겨두었다고 볼 수 있다.
선언문은 한인 사이에 주권을 주고받는 일이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國憲)’이고, 한인이 아닌 사람에게 주권 양도는 근본적으로 무효라며 대한제국의 ‘완전한 상속자’는 일본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에 따라 독립운동가 자신들이 ‘묵시적’이면서 평화롭게 주권을 이어받아 대한제국의 토지, 인민, 정치를 계승할 특권이 있고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음을 밝혔다. 그래서 선언문 찬동자 14명은 8월29일을 경술국치의 날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황제권 소멸’의 날이자 ‘민권 발생’의 날로 규정했다. 또 구(舊)한국 최후의 하루이자 ‘신한(新韓) 최초의 1일’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독립운동가들이 대한제국의 유산을 상속받지만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지 않고 주권이 ‘민(民)’에게 있는 세상, 즉 독립 이후 국민 주권 국가를 수립하겠다며 창조적 계승을 선언한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은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전환을 명확히 함으로써 2년 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내세울 수 있게 한 디딤돌이었다. 또한 대한제국-독립운동-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헌정사적인 연결성에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더구나 한국근·현대사를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선언문이 갖는 의미를 더욱 도드라지게 파악할 수 있다. 대동단결선언은 전통의 대동사상과 서구의 공화주의가 융합해 한국적 민주주의가 지향할 가치를 처음으로 제시한 선언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가치를 민주공화라 압축해 불러왔다. 그래서 7월4일을 민권의날로 제정하면 국가기념일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기념일이 될 것이다.
신주백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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