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경제 항산항심] 당겨쓴 여력, 당겨쓸 여력
몇 년 전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나름 규모가 있는 카페를 창업한 친구를 보며 큰 액수의 명예퇴직금이 부럽기도 했지만 사업의 성공을 빌었다. 그러나 곧 코로나19가 닥치면서 경영난에 직면했고 결국 지난해 폐업을 했다. 카페가 팔리지도 않고 창업자금 대출 이자도 부담이 됐다는 이유다. 그 친구를 만날 때면 더 이상 여력이 없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여력(餘力)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을 하고도 남아 있는 힘을 뜻한다. 여력이 있다면 어렵거나 힘든 일이 닥쳤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고 극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경제 주체들은 평소 여력을 비축해 둔다. 가계가 저축을 하고 기업은 사내유보금을 확보하고 정부는 적정한 외환보유고와 재정 건전성에 신경을 쓴다. 최근 경제 불확실성이 크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경제 여력 확보는 대단히 중요하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제 주체들의 여력은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당장 살아남기 위해 빚이라는 여력을 미리 당겨서 사용하게 됐다. 경기 대응력이 취약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정부 정책자금 지원으로만 견디기 어려워 대출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영세 중소기업들도 업황 악화에 따른 손실을 대출로 감당하면서 경영을 영위했고 정부도 위기 극복을 위한 재정지원 정책을 쏟아내며 나라빚이 증가했다.
이처럼 빚이라는 여력을 당겨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여전히 빚의 함정에서 허덕이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빚이 증가한 상황에서 고물가를 잡기 위한 금리 인상으로 경제 주체들의 이자 비용까지 증가하면서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특히 자영업자를 비롯한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다중채무자가 늘고 연체율이 높아지며 휴업이나 폐업이 증가하는 등 위험한 시그널이 나타나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당겨쓸 여력 즉 빚을 더 내어 생존할 수 있는 여력조차도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2023년 기준 자영업자가 약 34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3%로 전국보다 높고 7대 도시 중에서도 가장 높은 부산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소상공인들이 더 이상 당겨쓸 여력이 여의치 않으니 결국 정부가 나서고 있다. 얼마 전 25조 원 규모의 지원을 발표했다. 정책자금 상환 최대 5년 연장, 보증부 대출 만기 연장, 저금리 대환대출 확대와 같은 금융지원 정책과 배달료 완화 추진, 전기료 지원 대상 확대, 키오스크 보급 등 경영 부담을 완화하는 대책도 내놓았다.
과거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금융지원을 비롯한 경영 부담 완화 정책이 소상공인의 성장과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데 아쉬움이 있다. 우선 금융지원은 소상공인들이 당겨쓴 여력의 소진 기간을 연장해 주는 조치로 볼 수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과연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을까 라는 근본적 의문이 든다. 금융 지원책은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됐고 카드 수수료 인하,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등과 같은 경영 부담 완화 정책도 추진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소상공인들의 어려움은 계속되는 상황이고 경제 충격이 있을 때는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므로 금융지원 중심의 정책도 필요하지만 소상공인의 시장 진입과 성장, 그리고 재기의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는 지원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우선 준비된 창업이 중요하다. 시장진입 장벽이 낮은 도소매·숙박음식점업이나 개인서비스업과 같은 골목상권 중심의 자영업 창업일지라도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상권 분석과 창업 관련 교육이나 컨설팅을 제공해 시장의 안정적 진입을 통해 생존 기간을 늘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디지털·플랫폼 경제에 부응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과 같은 소상공인의 성장사다리를 갖춰줘야 한다. 더불어 재기가 가능하도록 폐업과 재창업·재취업 관련 지원책도 정비돼야 한다. 또한 소상공인의 폐업은 소득 상실을 의미하므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 장치로서 노란우산공제나 고용보험 가입에 대한 지원도 확대해야 한다.
지역 소상공인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안정적 성장이 이루어져 위기가 오더라도 당겨쓸 여력이 충분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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