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 "일본군 위안부 아픔, 진정 공감하면 반복되지 않을 것"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한 시대의 아픔을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공감하면,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똑같은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된다. 옥스퍼드대 강연에서 제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문장 하나로 요약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작품 세 편을 발표한 소설가이자 배우 차인표는 최근 그의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이하 '같은 별을')을 주제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강연했다.
옥스퍼드대 아시아·중동학부 조지은 교수 연구팀은 제1회 '옥스퍼드 한국 문학 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차인표를 초청했다. 10월 새 학기에 '같은 별을'을 수업 교재로 사용할 예정인 조 교수는 개강에 앞서 차인표에게 강연을 청했다고 한다.
15일 서울 강남구 TKC픽쳐스 사무실에서 만난 차인표는 "학생들은 물론 근처 주민들도 들을 수 있는 강연이었는데, 한 영국인 90세 할아버지가 '홀로코스트는 알았어도 한일 사이에 이런 역사는 몰랐다'며 고맙다고 하신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차인표는 1997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한국인 '훈 할머니'(한국명 이남이)가 55년 만에 고국 땅을 밟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몇 달 동안 분노와 슬픔, 부끄러움에 시달리다가 복잡한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보 작가에게 소설 쓰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시작은 엉망진창이었죠. 소설 작법을 알지도 못하고, 분노, 아쉬움, 원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만을 갖고 쓰려다 보니까 제대로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중단했다가 7∼8년이 더 걸렸어요."
그가 본격적으로 다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2006년부터다. 2년 반가량 국제구호단체 '컴패션' 자원봉사 활동을 위해 배우 활동을 쉬면서 집필할 시간을 낼 수 있었고, 이 시기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을 더 가까이 느껴보기로 했다.
차인표는 "어머니께서 '소설가한테 상상력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상상은 모래로 성을 쌓은 것처럼 쉽게 무너진다'고 말씀하셨다"며 "발품을 팔아서 눈으로 직접 보고 깊이 느끼고 묘사하라는 뜻이었고, 그 말씀이 나를 각성시켰다"고 털어놨다.
이에 차인표는 2006년 3월 '같은 별을' 배경인 백두산을 찾아가 주인공 순이가 살았던 산골 마을의 풍경을 머릿속에 새겼고, 그해 4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활 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매년 한 달씩 나눔의 집에 와서 할머니들을 돌보는 40대 일본인 자원봉사 여성 두 명을 만났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소설의 방향도 달라졌다고 한다.
당초 차인표가 생각한 소설의 내용은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간 여주인공을 남주인공이 구해 내고 일제를 응징해 카타르시스를 주는 내용이었지만, 완성된 소설에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 소녀를 구하려는 일본군 대위가 등장한다.
이 일본인 대위는 일본군 위안부로서 고초를 겪은 할머니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는 일본인 자원봉사자들처럼 일제의 만행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인물로 묘사된다.
차인표는 "할머니들의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저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보편적인 양심을 가진 많은 일본인이 할머니들의 아픔에 공감하면 결국은 진정한 사과로 이어지고, 거기서 용서도 가능하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9년 첫 소설 '잘가요 언덕'이 출간됐다. 유명 배우가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관심도는 높지 않았다고 한다. 한 차례 절판됐다가 2021년 제목을 바꿔 내놓은 개정증보판이 바로 '같은 별을'이다.
차인표는 처음 책이 나왔던 때를 떠올리며 "서점에 가 봤더니 소설 신간 코너에 제 책이 놓여있는 게 아니라 아이돌의 사진집이랑 한 여배우가 낸 메이크업 관련 책이랑 같이 묶여서 판매되고 있었다"며 "많이 의기소침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지금도 제가 글을 잘 써서 옥스퍼드대 강연에 초청받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미 한 차례 절판됐고 15년 전에 나왔던 책인 데다 베스트셀러가 되지도, 상을 받지도 않았던 책인데 제 책이 선택된 건 오로지 위안부 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제가 예전 훈 할머니를 보고 마음이 아파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싶었던 마음을 소설의 형태로 쓴 건데, 그분들(피해자들)의 아픔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알아주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차인표는 '신고합니다'(1996), '그대 그리고 나'(1997), '왕초'(1999), '불꽃'(2000), '그 여자네 집'(2001), '영웅시대'(2004), '하얀거탑'(2007) 등 많은 드라마를 히트시킨 배우지만, 그저 인기만 좇으며 활동하지 않았다.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인 40세 전후 2년 반가량 자원봉사를 위해 본업인 연기를 중단했고, 이후에도 꾸준한 기부와 선행으로 박수를 받아왔다.
향후 계획을 묻자 목표나 성취보다는 소명이나 사회적 보답에 초점을 맞춰 답했다.
차인표는 "저는 운이 좋아서 10년 넘게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며 "이제 새로운 사람들한테 기회가 가야 하고, 그 과정에서 저한테 필요한 역할이 있으면 하겠다"고 답했다.
"일도 중요하지만, 저는 저라는 사람이 적재적소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지에 집중해서 살아온 것 같아요. 실력도 없는 내가 유명해져서 잘 살았으니까, 지금부터는 내가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책임감을 느껴서 그렇게 했고요. 결국은 저한테는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목표보다는 왜 이런 행동을 하느냐 하는 동기가 더 중요했던 것 같네요."
jae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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