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기대도 맞닿지 않는 살… 외로운 존재들의 초상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4. 7. 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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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석, 현실의 중력 바깥에서 여울지는 천
‘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 작품
군용 사물에 신체 빗댄 방식 회화
따뜻한 인간 골격, 찬 쇠기둥에 투영
‘공간구조’ 유기적 자연의 원리 응시

◆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

수풀 한 더미를 사이에 둔 하늘 위에 해와 달이 또렷이 뜬다. 이재석(35)은 낮밤을 동시에 품은 이 풍경에 ‘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2022)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경을 점령한 것은 텐트의 뼈대를 이루는 가느다란 쇠기둥과 팽팽하게 당겨진 로프들이다. 비틀대는 자세로 뿌리내린 여섯 개의 골조가 복잡하게 중첩된 탓에 천을 씌워 각 텐트를 완성하기란 어렵게만 보인다. 서로 단단히 묶인 선들은 하나의 연결된 덩어리인 한편 각자의 독립된 몸으로서, 장면을 꿰매듯 엮어내는 동시에 수많은 조각으로 분열시킨다.
‘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2022)
“군용 텐트를 순서에 따라 조립하며 그 구조의 안팎에 놓인 ‘나’에 대해 고민했다. 텐트를 이루는 부품들은 단독으로서는 쓸모없는 존재다. 개별 부품들은 비상시 설치와 운반에 용이하도록, 가장 효율적으로 전체에 기여할 수 있도록 여러 차례 자신의 모습을 정제했을 것이다.”

3년 전 그와 나눈 짧은 대화록 중 일부다. 이재석은 군용 사물들에 자신의 신체를 빗대어 보는 방식으로 회화의 소재를 구축해 왔다. 입대 후 겪은 부상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신체의 구조를 기계에, 또는 크고 작은 사회적 유기체에 투영하도록 이끌었다.

“완성된 텐트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천이 마치 사람의 피부 같았다”는 말이나 “얇은 막으로 내면을 숨긴 채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텐트의 형상이 유기체의 몸처럼 느껴졌다”는 고백에 비추어, 앞서 언급한 회화작품 ‘연결과 동시에 분리된 경계’의 화면 속 완성되지 못한 텐트의 앙상한 골격은 불완전한 개인의 표상일 터다. 무너질 듯 가까이 기대도 끝내 서로의 살이 맞닿지 않는, 필연적으로 외로운 존재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끈끈하게 얽힌 듯 보이나 결국 각자의 영역에 발을 디딘 채 저마다의 그림자를 상상하는 여섯 개의 쇠기둥들.

화면 상단 좌우에 뜬 해와 달의 형태가 대칭을 이룬다. 수풀 속에서 엿본 두 시간의 지평은 이어진 동시에 나누어진 채로, 땅 위에 버티고 선 현재의 몸들을 얼마간 고립시킨다. 기하학적 형태의 부품으로 은유된 몸은 다시금 보다 보편적이고 관념적인 도상으로 재해석되며 의미를 확장한다. 차갑고 예리한 뼈대를 드러낸 텐트는 피부 아래 불안과 고독의 정서를 암시하는 한편 역설적으로 자연을 품은 산등성이의 모습이나 밤하늘에 그어 둔 별자리의 형태를 떠올리게도 하는 것이다. 쇠기둥의 꼭짓점이 별처럼 빛난다.

◆현실의 중력 바깥에서 여울지는 천

아직 조립되지 않은 은유의 조각들이 회화의 시공을 유영한다. ‘공간구조’(2023) 연작의 화면 속 해는 가라앉아 달이 되고, 달은 떠올라 해가 된다. 땅에 깊숙이 박혀 있던 쇠말뚝은 본연의 자리에서 수직으로 부상하며 텐트의 붙잡힌 살갗을 가벼이 놓아 준다. 상처 입은 몸으로 하여금 유연한 생명력을 회복할 여지를 갖도록, 정교한 건축이 되지 못한 천으로 하여금 그저 흩날릴 자유를 되찾도록 말이다. 구조를 올곧게 지탱하던 힘의 사라짐에 따라 흰 천은 배의 돛처럼 여울진다.
‘공간구조 4’(2023)
이재석의 화면 속 자연의 모습은 어딘가 생경하다. 아마도 처음부터 무엇도 자연이지 않아서, 그리고 동시에 모든 것이 자연이라서 그렇다. 따뜻한 인간의 골격을 차디찬 쇠기둥에 투영하는 시도는 한편으로 일련의 비인간적 체계로부터 유기적 자연의 원리를 발견하고자 응시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의 태도를 닮은 관념의 세계 속 군용 텐트의 표피는 피부였다가 산등성이가 되고, 미지의 우주가 되고, 다시 커다란 바다가 된다.

극도로 정제된 형태와 색채의 도상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반드시 제 윤곽 내에 머무른다. 이 섬세한 요소들은 주변부에 최소한의 그늘만을 드리우며 오직 자신의 양감을 호소하는데, 저마다의 생김새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도리어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세계의 대상들과 무척 닮은 한편 익숙한 물리적 법칙에 조금씩 어긋난 방식으로서 평면 위에 배열된 탓이다. 오래된 삽화처럼, 구체적인 우화처럼, 신비로운 증언처럼 말이다.

이재석은 1989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목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갤러리 바톤(2023), 챕터투(2023), 디스위켄드룸(2022), SeMA 창고(2021),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2021), 아트 스페이스 128(2020), 갤러리 밈(2020), 이응노미술관 신수장고 M2(2018)에서 개인전을 선보였다. 그간 아트센터 화이트블럭(2024), 울산시립미술관(2023), 일민미술관(2023), 광주시립미술관(2022), 스페이스K(2020), 대전시립미술관(2019) 등 주요 미술관이 개최한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2022년부터 2023년까지 화이트블럭 천안창작촌 레지던시에 입주하여 작업했다. 올해 쉐마미술관과 대전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전시에서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전시립미술관 등의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 중이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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