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더미서도 살려했지만…국가는 인간 될 기회 뺏었다

신심범 기자 2024. 7. 1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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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수용 디아스포라 <3> 상 파피에-거리의 유령


- 충무동 매립지에 ‘공설 진개장’
- 가구재이라 불린 넝마주이 모여
- 왕초 중심 사회 만들어 살았지만
- 증명할 ‘호적’ 無…장외인간 취급
- 정부 창설 근로재건대 의무등록

- 단속반 잡히면 영화숙·재생원행
- 인간으로서 삶 지속하기 위해선
- 행정력 안 닿는 곳으로 ‘도피’뿐

과거에는 쓰레기장을 진개장(塵芥場)이라 불렀다. 이름대로 폐기물이 던져지는 공간이다. 부산에는 서구 충무동 해안에 자리했다. ‘부산 매립왕’ 이케다 스케타다가 1940년 남항을 매립해 만든 니은(ㄴ) 자 모양 땅의 내각 지점이다.

처음부터 진개장으로 쓸 요량은 아니었다. 매립 직후인 1941년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고, 4년 뒤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전쟁통에 매립지는 제대로 분양되지 못했다. 결국 이 땅은 오랜 시간 별다른 도시계획 없이 방치됐다.

이후 전쟁이 터지며 수많은 피란민이 부산의 항만과 산복도로로 몰렸다. 인구가 불어나면서 쓰레기 또한 폭발적으로 늘었다. 자연스럽게 매립지 일대가 쓰레기장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곳은 전쟁기 ‘부산지구 공설진개장’으로 활용됐다. 1967년 부산 공동어시장이 생겨나기 전까지의 일이다.

1960년 부산 서구 송도윗길에서 바라본 남항. 주택 너머 천막촌이 형성된 곳이 당시 진개장 땅이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이 버려지는 땅 주위로 ‘가구재이’가 몰려들었다. ‘가구’ 또는 ‘강구’는 광주리를 뜻하는 경남 방언으로, 가구재이는 곧 넝마주이를 뜻했다. 이들 대부분은 가족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 채 세상에 나체로 던져졌다. 던져지듯 태어났으나 삶을 던질 수는 없었다. 버려지는 것이 모이는 이 공간에서 넝마주이는 삶을 가꿨다. 이곳에 판자촌을 형성한 영세민과 함께, 넝마주이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옷을 입고, 집을 찾고, 끼니를 구했다.

▮음지로 던져지다

이구야 씨(왼쪽), 김세근 씨


넝마주이는 장외인간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국가의 당당한 구성원, 즉 국민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음지에서 암약하며 사회 명랑을 해친다’고 인식된 이들이다. 무엇보다도, 이들 자신부터 어디서 온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증명할 호적이 없었다. 엄마 아빠의 얼굴은 물론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고 살아왔다. 넝마주이들끼리 붙여준 별명이 이름을 대신했다.

그러니 이들은 처리하기 쉬운 ‘물건’으로 취급됐다. 집단수용시설의 머릿수를 간단히 채우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국가는 이들에게 ‘연고가 없다’거나 ‘무의무탁하다’, ‘불량하다’는 딱지를 붙이고는 이 시설, 저 시설로 내던졌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따지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집 없고 가족 없는데, 이들의 강제수용에 목소리 높여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양지’와는 다를지언정 넝마주이에게도 그들만의 삶이 존재했다. 서로에게 의탁해 서로를 양육했다. 주먹 센 ‘왕초’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사회를 이뤘다. 꾀죄죄한 복장으로 더러운 일에 종사하더라도 어떻게든 돈을 벌었다. 도시 변두리를 맴돌아야 할지라도 삶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나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라는 실존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제 죽어도 누구 하나 몰라줄 놈’으로 여겨졌다. 유령이나 마찬가지였다.

넝마주이는 상 파피에(Sans Papiers·서류 없는 사람)와 같은 처지였다. 불법 이주자를 뜻하는 불어다. 분명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자신을 증명할 서류가 없어 합법의 영역을 피해 떠도는 이들이다. 넝마주이 대다수 역시 국가의 영역 바깥, 비법(非法)의 지대를 이리저리 떠돌았다. 양지에 모습을 드러내 봐야 그들이 갈 곳은 집단수용시설 외에 달리 없었다.

그러니 생존하려면 국가의 눈을 피해 그늘 아래로 몸을 숨겨야 했다. 사람을 피해 시장 골목 어두운 곳에서 잠을 청했다. 불법도 감행했다. 어린아이가 영역 앞을 지나면 통행료 명분으로 돈을 갈취하고, 야심한 밤을 틈타 물건을 훔쳤다. 머릿수를 앞세워 강도질하거나 주먹을 휘두르는 식의 해악도 부렸다. 넝마주이끼리 영역 다툼이 붙을 때 집게를 흉기 삼아 혈육전을 벌이는 광경은 당대 시민 누구나 기억하는 장면이다.

▮양지에서 떠밀리다

1950년대 초 서구 충무동 부산시 진개장. ‘부산지구 공설진개장’이라 쓰였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제공


국가는 영역 바깥을 떠도는 이들을 찍었다. 부랑아 또는 양아치 등으로 칭하곤 사회를 정화하겠다며 이들을 끊임없이 단속해 한 곳에 모아 가둬두었다. 품성 바른 인간으로 갱생시키겠다고, ‘인간 복귀’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수용시설에서 인간으로 거듭난 이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외려 학대와 굶주림, 폭력으로 인간 이하의 존재로 전락했다. 국민 눈앞에서 치우는 것 외 국가는 무엇도 고려하지 않았다.

소싯적 충무동 진개장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이구야(67) 씨의 삶이 그랬다. 그는 가족의 존재를 모른다. 본명이 무엇이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별명 ‘딱딱이’ 또는 ‘딱따구리’로 살았다. 사하구 감천동의 어느 고아원에서 지냈다는 것이 생애 첫 기억이다. 여섯 살 무렵 그는 흙장난을 치다 이유 없이 단속차에 실려 장림동의 집단수용시설 ‘영화숙’으로 끌려갔다. ‘코스모스 반’처럼 꽃 이름이 붙은 고아원 방에서 지내던 그는 하루 아침에 ‘소대’로 수용공간을 구분하는 군대식 공간으로 던져졌다.

집단수용시설에서 작동하는 통제 방식은 오로지 폭력이었다. 그저 맞아 터지고, 진흙탕을 구르고, 끼니를 거르며 기약 없이 갇혀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잡아가 놓곤 발바닥이나 엉덩이를 때립니다. 밀가루 펴는 방망이로요. 열 대만 때려도 피가 터져요. 옷을 두세 겹 껴입어야 멍이 덜 들어요.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지금도 살이 떨립니다.”

영화숙에서 탈출한 뒤 그는 자연스레 깡통을 들고 식량을 구걸했다. 머잖아 넝마주이가 됐다. 갈 곳 없이 밥 굶는 처지였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충무동 진개장 제3지대로 불린 넝마주이 영역에서 폐지를 주웠다. 입항한 선박의 설거지를 해주고 선원이 남긴 음식을 받아오기도 했다.

넝마주이들은 1962년부터 정부가 창설한 ‘근로재건대’에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했다. 처음 재건대가 만들어질 때 부산에만 1180명이, 전국적으로는 약 3490명이 이 단체에 소속됐다. 국가는 재건대를 통해 넝마주이를 관리·감독했다. 관할 경찰서 등이 운영하는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했고, 재건대 소속이 아닌 자가 폐품을 주우면 처벌했다. ‘제○지대’ 식의 구분도 재건대가 넝마주이 관리를 위해 붙였다.

▮진개장에서 ‘사람’이 되다

쓰레기 그늘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집단수용시설과 같은 ‘국가의 품속’과 견주면 차라리 나았다. 이 씨가 자신의 지대에서 왕초로 모신 ‘큰 아저씨’는 부인과 딸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지대 왕초와는 달리 잘 때리지 않았다. 돈도 떼먹지 않아서, 하루치 돈을 상납하면 그중 일부를 노역으로 꼬박꼬박 챙겨줬다. 명절이면 ‘영화라도 보고 오라’며 30원씩 주는 호의도 베풀었다.

국가가 시키는 대로 재건대에 들어 생활했지만, 국가는 여전히 이 씨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이 씨는 넝마주이 생활 중에도 몇 차례 단속반에 급습당해 영화숙으로 잡혀갔다. 스무 살을 넘긴 나이에도 초량동 인근 시장에서 생활하던 중 ‘형제복지원’으로 붙잡혀 3개월가량 감금당했다. 그 무렵 부산시는 이 씨와 같은 노숙인을 잡아다가 성인 부랑아 시설 ‘재생원’에 수용했다. 형제복지원은 영화숙·재생원 폐쇄 뒤 후신 시설로 기능했다.

결국 이 씨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지속하려면 행정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끊임없이 도피해야 했다. 그는 “깊은 잠을 자본 적이 별로 없다. 저녁이나 새벽마다 단속반이 들이닥칠까 봐 마음 졸여야 했다. 지금도 잠을 잘 때마다 불안감이 들어 소주 한두 잔을 마신다”고 했다.

오랫동안 인간으로 공인되지 못한 그에게 호적을 만들어준 건 다름 아닌 넝마주이 왕초였다. 성인이 돼 제대로 취업하려면 주민등록증은 가져야 한다며 직접 행정 일을 봐줬다. 성씨도 모르는 그를 위해 ‘이구야’라는 이름까지 지어줬다. 그의 별명인 ‘딱따구리’에서 따왔다.

국가가 ‘갱생’처럼 허울만 남은 말을 앞세워 수용시설에 이들을 가두고 폭력을 행사할 때, 쓰레기 더미 속 동료는 적어도 그가 호적이라도 등록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이주 생활도 비로소 끝날 수 있었다. “주민등록증이 나오고서야 마음 놓고 살 수 있었습니다. 경찰관이 나타나도 단속당하지 않았어요.”

▮‘사회화’에서 배제되다

국가의 집단수용시설은 이 유령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사람 대접받을 여건조차 주지 않았다. 수용시설은 아이를 강제 구금해 가둬두는 동안 부모의 존재나 연고를 묻지 않았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려는 노력은 당연히 꿈꿀 수 없었다. 호적이 없는 아이가 국가 시스템에 정식 등록될 수 있는 절차 같은 것 역시 없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와 형제복지원에서 오랜 시간 고통받은 김세근(67) 씨도 30대가 다 돼서야 사람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이 고향인 그는 6살 때 고모와 함께 창경원으로 놀러 갔다가 그만 손을 놓쳤다. 미아가 된 김 씨는 수위실을 거쳐 서울시로 인계됐다. 그리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14통(미아통)에 수용됐다. 이곳은 각 수용방을 ‘통’으로 구분해 불렀다.

8살이 돼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김 씨는 아동통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신입 빠따’를 맞았다. 원생 중에서 뽑힌 중간 관리자인 ‘통장’이 엉덩이가 터지도록 곡괭이를 휘둘렀다. 시설은 김 씨를 아동통으로 옮겼는데도 학교에는 보내주지 않았다. 등교는 원생 1700명(총 18통) 중 모종의 기준으로 선별된 50~60명의 아이에게만 허용됐다.

김 씨에게는 중노동만 기다렸다. 그는 통장 아래의 또 다른 중간 관리자들인 ‘대발랑’이나 ‘소발랑’의 지시대로 삼각산에 올라 싸리나무를 걷어 빗자루를 만들었다. 포댓자루에 돌과 흙을 담아 시설의 축을 쌓는 노역에도 동원됐다. 보호소는 서울시가 운영하는 기관이었으니, 통마다 공무원이 배치됐다. 그런데도 이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강제노역에 입을 대지 않았다.

▮“넌 국제 미아, 죽여도 할 말 없어”

15세 무렵 이곳에서 탈출한 김 씨는 ‘자갈치시장에 가면 먹을 게 많다’는 친구 말에 혹해 청량리역에서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경찰관에게 붙잡혀선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당시 남구 용당동에 형제복지원이 자리한 시절이다. 그곳에서도 김 씨는 무거운 돌과 흙을 나르고, 소대장 같은 중간 관리자에게 매를 맞았다. 그때 허리를 잘못 맞아 척추 장애 5급을 얻기까지 했다. 1962년에 처음 시설에 들어가 1982년에서야 시설과 인연을 끊었던 김 씨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김 씨는 정신의학과 약을 꾸준히 먹고 있다.

20년간 시설에 갇혀 지내며 시설은 김 씨에게 호적 하나 만들어주지 않았다. 한글도 배우지 못해 어른이 돼서도 글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못 배운 게 가장 한이 된다. 예를 들어 친구와 ‘돌고래 다방에서 보자’고 약속을 잡으면, 눈앞에 그 다방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은 읽기는 대충 되지만 쓰는 건 다 틀린다”고 하소연했다.

이런 탓에 그는 불법 체류자와 다르지 않은 신세에 놓였다. 수시로 일당 후려치기에 시달렸다. “시설에서 나왔을 무렵엔 몸이 많이 망가져 힘든 일을 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중국집 배달 일을 했는데, 주민등록증도 없고 신원증명서도 없다는 이유로 한 달에 5000원만 줬습니다. 뒤늦게 친구의 도움으로 호적을 얻으니 월급이 8만 원으로 올랐어요.”

죽어도 아무도 몰라줄, 사라져 버려도 괜찮을 인간 취급까지 당했다. “하루는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고 군경 초소 앞을 지날 때 검문을 받았는데, 주민등록증을 내지 못해 말 못할 대우를 받았습니다. ‘너 이 개새끼야, 어디서 왔어? 너는 우리가 쏴 죽여버려도 할 말도 없어’라고…. ‘너는 새끼야, 국제 미아야’라면서 쌍소리를 했었죠.” 참 인간으로의 갱생을 약속한 국가가 개인을 20년간 수용소에 썩힌 결과가 이것이었다. 인간이 될 기회를 빼앗곤 철저히 장외인간으로만 살도록 내던져진 것이다.

영상= 박세종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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