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떡볶이 먹방’의 청구서 [시민편집인의 눈]

한겨레 2024. 7. 1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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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원 에스케이(SK) 수석부회장(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윤석열 대통령, 구광모 엘지(LG)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정기선 에이치디(HD)현대 부회장 등 대기업 총수들이 2023년 12월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을 방문해 떡볶이와 빈대떡을 시식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보도된 사진과 동영상 중 국민에게 가장 ‘씁쓸함’을 안긴 장면은 무엇일까. 아마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장면 중 하나가 ‘재벌 떡볶이 먹방’일 것이다. 지난해 12월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에서 재벌 총수들이 윤 대통령 옆에 도열해 떡볶이를 먹던 모습 말이다. 당시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은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집었다 접시에 도로 놓는 장면이 ‘짤’(화제 영상)로 돌았는데, 부랴부랴 ‘사실은 맛있게 먹었다’며 해명 영상이 등장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재벌 총수들이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를 무마하는 행사에 병풍처럼 동원된 장면은 ‘한국 자본주의의 수준’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주요 그룹 총수들은 2023년 한해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10여차례씩 동행했다고 한다. 남태평양의 쿡제도 등에서 각자 엑스포 득표 활동을 한 것을 빼고도 말이다. 형사재판, 세무조사 등 약점 많은 재벌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응했으리란 해석도 있지만, 묵묵히 따라준 재벌이 곧 정권에 ‘청구서’를 들이밀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다.

정부가 지난 3일 발표한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은 ‘드디어 재벌의 청구서가 도착한 것인가’ 하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최대주주 보유주식 상속에 적용해온 20% 할증을 기업가치 제고(밸류업)를 명분으로 폐지하는 것 등 재계 희망사항이 충실하게 반영됐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은 이에 앞서 상속세 최고세율을 50%에서 30%로 낮추겠다는 의중을 밝히기도 했다. 주식거래 등으로 5천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린 투자자에게 물리는 금융투자소득세를, 2025년 시행 전에 아예 폐지한다는 계획도 개편안에 포함됐다.

재벌 등 부유층의 세금 부담을 낮춰주면 한국 증시에서 주식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는 정부와 재계의 주장은 실증적인 근거가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지적한 사실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는 높은 상속세 탓이 아니라 한국 기업의 불투명한 회계 관행, 후진적인 지배구조, 미약한 주주 환원 등의 결과라는 게 학계에서 정립된 견해다. 그러나 이를 개선하기 위해 추진돼온 상법 개정 등은 재계의 반대로 무산됐고, 감세만 남았다.

재벌 등 부유층의 세금을 깎아줘도 나라 살림에 문제가 없다면 걱정이 덜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가 재정은 수십조원의 세수 결손이 예상되는 위기다. 기획재정부가 지난달 밝힌 ‘5월 국세 수입 현황’을 보면 5월까지 걷힌 국세는 151조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9조1천억원이나 적다고 한다. 2023년은 사상 최대인 56조원의 세수 결손이 발생한 해다. 경기가 나빠 기업실적이 하락한 탓도 있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등을 깎아준 결과가 반영됐을 것이다. 정부는 외국환평형기금 등을 동원해 모자라는 자금을 ‘돌려막기’ 하거나, 지방교부세·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줄이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지방정부 살림은 더욱 쪼들리고 지역 불균형은 한층 심해질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저서 ‘시스템’(The System)에서 소수의 독과점기업이 정치권·정부와 결탁해 법과 제도를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표적인 수법이 고소득층의 세금을 깎아주고, 규제를 줄여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더욱 강화하게 해주는 것이다. 라이시 교수는 감세로 인한 재정 부족으로 미국의 의료서비스와 공교육, 복지제도가 뒷걸음질하고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해졌다고 고발했다. 그는 특히 상속세의 허점으로 부가 손쉽게 세습되면서 일어나는 불평등의 고착화와 민주주의의 손상을 걱정했다. 이는 결코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진보정당을 자칭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수뇌부마저 부자감세 유혹에 흔들리는 현실에서, 그래도 한겨레는 정부 감세 정책과 허울뿐인 건전재정 논리를 일관되게 비판해왔다. 그러나 그 많은 정치 기사들 사이에서 이 문제가 몇번이나 1면 톱으로 다뤄졌는지 헤아려보면, 정책의 물꼬를 돌리려는 뉴스룸국의 의지가 충분했는지는 회의적이다. 운이 좋아 거대한 부를 물려받는 이들에게 세금까지 줄여주는 게 맞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지 않나. 불평등 완화와 ‘진짜 역동적인 경제’를 위해, 좀 더 대찬 공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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