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법 전쟁에 ‘과학기술’ 뒷전… “과방위서 방송 떼어내야” 비등
AI 기본법도 폐기됐다 재상정
과학기술 관련 이력 위원은 5명 그쳐
與野 사실상 ‘방송전쟁의 장’으로 활용
방통위원장 후보 이진숙 지명에 격화
野 방송4법 강행 처리도 ‘또하나 폭탄’
16일 전체회의서 AI기본법 상정 예정
21대선 정쟁에 발목 잡혀 자동폐기돼
“과방위 과학기술·방송통신 분리해야”
“지금 (김홍일) 방송통신위원장이 도망간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지금 방통위가 파행으로 진행돼 온 책임은 더불어민주당에 있다고 생각합니다.”(국민의힘 박정훈 의원)
“사법부에 촉구합니다. 엄중한 수사로 피고발인(김홍일 위원장·이상인 부위원장)의 범죄행위는 물론이고 관여한 자들까지 명명백백하게 혐의를 밝혀 엄벌해 주시기 바랍니다.”(더불어민주당 이정헌 의원)
과방위가 말 그대로 ‘전쟁터’다. 김 전 위원장 탄핵을 두고 여야가 격돌한 데 이어 이번엔 김 전 위원장 후임으로 지명된 이진숙 방통위원장 후보 인사청문회로 공방이 예고되는 터다. 여야가 방통위원장을 두고 물러서지 않는 건 결국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등 공영방송 이사진 구성 주도권을 서로 갖고자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방송전쟁’이 과방위 소관인 과학기술 입법을 사실상 ‘인질’로 삼은 채 계속되고 있단 사실이다. 당장 인공지능(AI) 기술만 해도 세계 각국이 개발 경쟁을 지원하기 위한 입법 지원에 공을 들이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 국회는 방송을 둘러싼 여야 정쟁에 발목이 잡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단 평이 과학기술계에서 쏟아지는 터다. 실제 과방위원만 해도 절반 이상을 언론·방송계 출신 의원으로 채울 정도로 여야가 사실상 과방위를 ‘방송전쟁의 장’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과학기술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과방위에서 ‘방송’을 떼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야 방송전쟁은 김 전 위원장 자진사퇴로 잠잠해지나 싶더니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색 짙은 이진숙 전 대전MBC 사장을 차기 방통위원장 후보로 지명하면서 다시금 격화하는 모양새다. 야당은 이 후보 임명 즉시 탄핵을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과방위에 놓인 ‘화약고’는 이뿐이 아니다. 본회의에 부의돼 있는 방송4법(방송3법+방통위법 개정안)도 야당이 이르면 18일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를 벼르고 있다. 공영방송 이사진 외부 개방을 골자로 한 방송3법의 경우 21대 국회에서 야당이 강행 처리한 이후 윤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 바 있다. 이번에도 야당 단독 처리→대통령 거부권 행사→재표결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재표결 결과 폐기될 경우 야당이 재발의에 나설 공산이 커 소관 상임위인 과방위로선 또 하나의 ‘폭탄’이 될 수밖에 없다.
과방위의 방송전쟁은 원 구성 때부터 예고된 수순이었다. 당장 4·10 총선에서 압승해 170개 의석을 확보한 민주당은 과방위원장과 야당 간사에 각각 강경 성향인 최민희·김현 의원을 배치했다. 최민희 과방위원장은 지난해 국회 야당 몫 방통위 상임위원으로 추천됐지만 윤 대통령의 임명 거부로 결국 자진사퇴한 전력이 있다. 김 의원은 지난해 8월까지 방통위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터였다.
전체 과방위원 구성만 봐도 총 20명 중 55% 수준인 11명이 언론·방송계 출신 의원으로 채워졌다. 반면 과학기술 관련 이력이 있는 위원은 25% 수준인 5명에 그쳤다. 이런 인적 구성 때문에 정쟁 소지가 큰 방송 관련 문제가 과방위에서 주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국회 관계자는 15일 통화에서 “원래 과방위가 지역구와 관련된 예산이나 정책을 챙기기에 용이한 상임위가 아니다 보니 인기가 없는 편”이라며 “그런 와중에 언론·방송계 쪽 의원들이 주로 모이다 보니, 특히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 여야 전선이 뚜렷한 방송 문제와 관련해 강한 발언으로 주목을 받으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평했다.
이 관계자가 최근 과방위 내 ‘전사(戰士)형 초선 위원’ 사례로 꼽은 건 민주당 이훈기·국민의힘 김장겸 의원이었다. 이 의원은 최근 과방위 전체회의에서 MBC 사장 출신인 김 의원이 피감기관인 MBC와 민사소송 중인 점을 들어 “적어도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 회피하거나 소송이 끝날 때까지 과방위에서 빠져주는 게 맞다”고 날을 세웠고, 김 의원은 “이재명 전 대표 변호인들이 법사위에 몰려 있어서 ‘이재명 로펌’이라 불리는 현실은 눈을 감고 저에 대한 공격을 한다”고 맞받았다. 김 의원은 최 위원장의 의사진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민주당은 이재명 전 대표를 ‘아버지’라 부르는데, 최민희 위원장은 ‘어머니’로 등장할 것 같다”고 해 반발을 샀다.
16일 과방위 전체회의에선 마침내 AI기본법(인공지능 산업 육성 및 신뢰 확보에 관한 법률안·안철수 의원 대표발의)이 상정될 예정이다. 그간 22대 국회 임기 시작 이후 과방위 전체회의가 총 6차례 이뤄졌지만 심사 법안은 방송4법이 전부였다. 다만 16일 회의에서도 이진숙 방통위원장 후보 인사청문회 관련 일정·자료제출·증인 등 문제로 여야 공방이 격화할 가능성이 커 본격적인 심사는 추후 전체회의나 소위에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과학기술계에선 현재 과방위 소관인 ‘과학기술’·‘방송통신’ 분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모습이다. 당장 하정우 네이버 AI이노베이션 센터장이 최근 국회 세미나에서 “과방위를 과학기술과 방송통신으로 분리해 주시면 좋겠다”며 “과방위에서 논쟁 여지가 많은 방송법 이슈 때문에 과학기술 입법이 속도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 항공우주연구원 원장을 지낸 이주진 전임 출연연구기관장협의회 회장은 이날 통화에서 “방송통신 쪽 정책·입법은 규제 성격이 강한 탓에 정쟁의 대상이 되기 쉬운 데 비해 과학기술 부분은 육성·진흥 쪽에 방점이 찍혀 있어 여야 간 이견이 크지 않다”며 “그런데도 언제나 과방위 안에서 방송통신을 둘러싼 정쟁이 우선되다 보니 과학기술 부분도 덩달아 논의가 지체된다”고 지적했다.
과방위 분리론은 여당 내에서도 제기된다. 구체적으로 정쟁이 불가피한 방송 부분을 따로 떼어내 별도 위원회를 설치하자는 식이다. 과방위 여당 간사인 국민의힘 최형두 의원은 12일 원내대책회의에서 “AI 관련 상임위인 과방위가 온통 방송 장악 문제로만 가득 차 있다”며 “이제 AI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방송은 민주당이 장악하자고 한다면 별도의 중립적인 방송위원회나 별도 상임위에서 다뤄야 되는 거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야당은 최 의원 주장처럼 방송만 분리하는 게 ‘방송·통신 융합’ 흐름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비현실적”이란 입장이다. 과방위 야당 간사인 민주당 김현 의원은 이날 통화에서 “방송·통신 융합 시대에 맞춰 2008년에 방통위를 만들었는데, 방송만 분리하자고 하면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는 어디로 가야 하냐”며 “(과방위 분리론은) 무책임한 주장이자 궤변”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야당 내에서도 일부 분리론에 동조하는 의견이 나온다. 21대 국회에서 과방위 소속이었던 한 의원은 이와 관련해 “과방위에서 과학기술 부분은 그 범위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떼어내는 게 적절치 않다. 소관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의 관계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미디어 부분을 발라내서 미디어 특위를 빼내는 게 현실적”이라고 강조했다.
김승환 기자 hwa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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