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10대 소년 소녀는 왜 서로를 사랑하나”…죽음·예술 다룬 ‘봄이 사라진 세계’ 원작 소설 →청춘 로맨스 그려낸 영화로 [선넘는 콘텐츠]
“난 죽을 거야. 반년 뒤에.”
일본의 한 대형 병원 옥상. 17세 소녀 하루나(데구치 나츠키)는 이렇게 말한다. 희귀병에 걸린 채 태어나 성인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뜰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나의 표정은 태연하다. 오히려 자신이 죽을 거란 말을 뱉어 상대를 당황하게 하고 싶단 투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동갑내기 소년 아키토(나가세 렌)는 놀라지 않는다. 아키토는 “그랬구나. 그래”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하루나는 당황한 표정으론 “안 놀랐냐”고 묻지만 아키토는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자신 역시 불치병에 걸려 1년 뒤에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다만 아키토는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키토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하루나가 궁금해진다. 매일 하루나에게 병문안 가며 가까워진다. 두 사람의 우정은 점점 끌림으로 발전해 가는데…. 과연 두 불치병 소년 소녀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지난달 27일 공개 직후 넷플릭스 글로벌 TOP10 비영어권 영화 부문에 포함된 ‘봄이 사라진 세계’의 내용이다.
● ‘죽음’보단 ‘로맨스’에 집중
일본에서 2021년 출간 직후 45만 부 팔리고, 국내 출판사 모모에서 2023년 번역 출간된 일본 작가 모리타 아오가 쓴 동명의 소설은 10대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의 의미에 대해 깊게 들여다본다. 예를 들어 아키토가 아프기 전 아키토의 할머니 역시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아키토의 부모가 이 사실을 할머니에게 알릴지 고민하자 아키토는 감추지 말고 솔직히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키토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이렇게 후회한다.
“반드시 당사자에게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가기보단 미리 사실을 알고 있어야 준비도, 각오도 할 수 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 뱉은 말을 후회한다. 듣지 않는 게 나았고 모르는 게 좋았다.”
아키토는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에 대해서도 소설 내내 고민한다. 처음엔 “죽음을 의식하는 건 수십 년 후의 일이라 생각했다”며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하며 “‘편하게 죽는 방법’. 요즘은 이런 것만 검색한다. 닥쳐올 죽음의 공포에 떨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고 고민한다. 수업 중 딴짓을 한다는 이유로 혼나지만 개의치 않고 “선생님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하지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 내게는 미래가 없다”고 비관에 빠진다.
반면 영화는 불치병에 걸린 소녀와 소년의 ‘로맨스’에 집중한다. 특히 10대인 두 사람이 살날을 얼마 안 남기고, 평범한 삶을 공유하며 가까워지는 과정을 잔잔한 ‘사랑’으로 그려낸 점이 돋보인다. 뽀얀 얼굴을 지닌 여주인공과 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남주인공의 눈빛을 섬세하게 담아 서로에게 닿을 듯 닿지 않는 사랑의 감정을 그려냈다. 죽음보단 로맨스에 집중해 일본식 청춘 드라마를 살려냈다.
메가폰을 잡은 건 미키 타카히로 감독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소녀가 등장해 국내에서 1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2022년)를 연출한 감독이다. 타카히로 감독이 집중한 건 하루나와 아키토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게 한 것이다. 타카히로 감독은 지난달 27일(현지 시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걸 상대방이 모르는) 짝사랑 시선”이라며 “전하지 못하고, 전해지지 않았고, 이룰 수 없었던 마음을 영화에서 표현하려 했다”고 했다.
● 현실 회피→인생 목적된 ‘예술’
소설은 죽음을 앞둔 두 사람에게 ‘예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도 집중한다. 특히 하루나는 끊임없이 병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이 그림은 마치 낙원처럼 보이지만 사실 천국이다. 죽음을 앞둔 하루나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자신이 가야 할 곳을 그리며 삶을 버텨나가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어쩌면 하루나에게 예술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수단일지 모른다.
“높푸른 하늘 아래 바다가 있고 무지개가 걸려 있다. 그림 한가운데는 계단이 있다. 하늘로 이어지는 계단이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계단을 오르고 있다. 마치 이제부터 천국을 향해 가려는 듯한, 묘한 그림이었다.”
아키토 역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개성이 없어 여자애들에게 인기도 없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나 다름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유일한 취미였던 그림 그리기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나를 만난 뒤 아키토에게 예술의 의미는 확장된다. 하루나와 보낸 하루를 기록하고, 인생이란 찰나를 음미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키토는 하루나를 만난 날이면 집에 와 스케치북을 꺼낸다. 주저 없이 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아까 본 저녁노을을 검은 연필만으로 그려나갔다. 연필을 눕혀 종이에 스치듯이 선을 그어 명암을 나타내기도 하고, 연필을 세워 가느다란 선을 그리기도 하면서.”
하루나가 세상을 떠난 뒤, 아키토는 하루나가 그리던 천국의 그림을 이어 그린다. 아키토가 세상을 떠나기 전 완성한 그림 제목은 ‘두 사람의 하늘’. 소설 초반 하루나가 그리던 그림이 소설 막바지 아키토의 손에 완성되는 것이다. 이로써 예술은 현실 도피 수단을 넘어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 낸 인생의 목적이 된다.
● 희망을 노래하는 ‘시한부 서사’
죽고 남겨진 사람의 뒷이야기가 담긴 독특한 구성도 소설의 특징이다. 소설을 구성하는 6개의 장이 끝난 뒤 맨 마지막에 ‘시한부 1년을 선고받은 친구를 좋아하게 된 이야기’라는 장을 넣어 두 사람의 친구인 소녀 미우라(요코타 마유)의 시선을 담은 것이다.
특히 소설에서 미우라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연애는 ‘시한부의 사랑’에 비하면 어지간히도 불운한 연애였다. 내가 한 사랑에 이름을 붙인다면 ‘유통기한 1개월인 가련한 사랑’”이라며 두 사람의 사랑에 의미를 부여한다. 또 죽은 두 사람과 달리 ‘살아남은 자’로서 희망을 노래한다.
“멋진 사랑을 꼭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날마다 살아가고 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희망을 품고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 그 아름다운 꽃처럼.”
이에 비해 영화에선 미우라의 독백이 없다. 다만 미우라가 두 사람이 떠난 뒤 삶을 살아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미우라는 아키토의 친구가 돼 병실을 지킨다. 아키토가 세상을 떠난 뒤 사랑을 뜻하는 꽃인 거베라 세 송이를 그의 빈소에 가지고 간다. 살아남은 자(미우라)가 죽은 자(하루나, 아키토)를 추억하는 장면을 애절하게 그려낸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6년), ‘안녕, 헤이즐’(2014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년) 등. 죽음을 앞두고 사랑에 빠진 연인을 다룬 영화처럼 뻔한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한 여자가 떠나고 남자가 이를 그리워하는 단순한 서사를 넘어, 연인이 남긴 삶의 희망을 살아남은 자가 이어가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니 우리 역시 남아 있는 나날을 충실히 살아내며 떠난 이들이 살아내지 못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 아닐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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