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여행’과 ‘플라멩코’…시각장애인 조승리 작가가 삶을 축제로 만드는 법

박송이 기자 2024. 7. 15.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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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출간
가난과 장애로 겪었던 아픔, 담담히 풀어내
장애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거절당하는 일”
여행·플라멩코가 취미…차별과 편견의 벽에 균열
장애인에게 ‘장애물 투성이’인 여행기 쓰고 싶어
조승리 작가가 8일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도중 자신의 에세이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들어 보이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열다섯 살 때부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갔다. 병원에서는 10년 정도 시력이 남아 있을 거라고 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침마다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섰지만 발걸음은 학교 대신 도서관을 향했다. 카프카, 무라카미 하루키, 윤대녕, 레이먼드 챈들러…손에 닿는 대로 책을 꺼내 활자를 눈에 담았다. ‘작가’는 가난 때문에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남몰래 품고 있던 꿈이었다. 그땐 책을 눈으로만 읽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시각이 사라져간다는 두려움도 책을 읽는 순간에는 잊을 수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후, 30대가 된 열다섯 소녀는 작가가 됐다. 2023년 샘터 에세이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조승리는 최근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달)라는 첫 책을 펴냈다. 책은 출간 3개월여 만에 입소문을 타고 6쇄에 들어갔다. 다소 엉뚱하면서도 달관의 느낌이 전해지는 책 제목처럼 그의 글은 슬픔, 아픔, 쓸쓸함 등 가난과 장애 때문에 겪어야 했던 감정들을 담담히 끌어안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걸음으로 나아가며, 생을 축제로 만들 빛나는 순간들을 빚어 나간다.

“방아깨비만도 못한” 외손주라며 자신을 타박했던 외조부가 장애인 직업학교로 떠나는 그를 울며 배웅했던 일, 그런 외조부가 그리웠던 어떤 날, 외조부가 살던 집터를 찾아 어릴 때 외던 다라니경을 암송하며 제를 올렸다는 내용의 글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비장애인 동행 없이 시각장애인 친구들과 직접 계획을 짜서 대만 여행을 떠난 일화, 알 파치노가 시각장애인으로 나오는 영화 <여인의 향기>를 보고 탱고를 배우게 된 이야기 등은 장애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벽에 시원스레 균열을 낸다.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없게 된 자신을 위해 불꽃 폭죽을 준비했던 친구, 직업학교에서 만난 다양한 동료들과의 우정, 안마사로 일하며 손님들과 나눈 속 깊은 대화를 다룬 글들은 타인의 따뜻한 개입이야말로 삶을 비극에서 축제로 이끌어준다는 걸 깨닫게 한다.

지난 8일 서울 동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조승리 작가는 “제 책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놀랐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요즘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10·20대는 늘 불안에 쫓기고 살았어요. 시력을 잃는 것보다 생계를 유지하는 문제에 대한 두려움이 클 만큼 가난했어요. 빈곤은 트라우마거든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늘 있었지만, 직업적으로 안정된 후에야 글이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종종 하는 말인데 장애인에게 진정한 자립은 경제적 자립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한국 사회에서의 장애를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거절당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별일이 아님에도 장애인이기 때문에 거절당하는 일이 빈번하다 보니, 그 현실의 제약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현실을 핑계 삼다 보면 계속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에 맞서려면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야 했어요.” 그는 대만 외에도 마카오, 태국 등으로 여행을 다녔다. 자신만의 여행은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탱고에 이어 플라멩코를 배우고 있다. “플라멩코는 화려한 춤이에요. 제가 살고 있는 현실은 캄캄하지만, 플라멩코를 출 때만은 화려하게 입고 무대에 서요. 새로운 내가 되는 기분이 너무 좋고, 춤 한 곡을 완성해 나가는 성취감도 커요.”

조승리 작가가 플라멩코 발표회에서 공연하고 있다. 조승리 제공

물론 현실의 제약은 여전하다. 거절과 조롱, 모욕이 계속해서 뒤따른다. 탱고를 배우기 위해 여러 학원의 문을 두드렸지만 ‘시각장애인을 가르쳐본 경험이 없다’라며 번번이 거절당했다. 여행지에서는 “앞도 못 보면서 여길 힘들게 뭐 하러 왔누”라는 무례한 타박부터 “장애인들이 저러고 다니면 창피하지 않나”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그는 “매번 받는 거절이지만 마음은 아프다”면서 “그런데도 깨지고 부서질 각오로 계속 도전하는 것을 보면 이제는 적극적인 태도가 자리 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의 여행을 제한하려고만 하는 인식과 여전히 ‘장애물투성이’인 시스템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여행기도 써볼 계획이다.

책 마지막에 수록된 글 ‘비극으로 끝날 줄 알았지’에는 삶의 비애에 지지 않는 단단한 삶의 철학이 담겼다. 지난해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그를 축하했다. 시상식 날 사람들이 그에게 건네 준 ‘검은 꽃’의 향기를 맡으며 비로소 자신에게 말한다. “나도 내가 자랑스러웠다. 처음이었다. 나는 내 자신이 무척 사랑스럽게 생각되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장래 희망을 “한 떨기의 꽃”이라고 말한다. “비극을 양분으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뻗고, 비바람에도 결코 휘어지지 않는 단단한 줄기를 하늘로 향해야지. 그리고 세상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품은 꽃송이가 되어 기뻐하는 이의 품에, 슬퍼하는 이의 가슴에 안겨 함께 흔들려야지. 그 혹은 그녀가 내 향기를 맡고 잠시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내 비극의 끝은 사건의 지평선으로 남을 것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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