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반전, 꼼수, 기록 쏟아진 ‘2024년 슈퍼 선거의 해’[사이월드]

최혜린 기자 2024. 7. 1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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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 당선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 당선인. AFP·로이터·타스연합뉴스

2024년은 전 세계 70여개국이 굵직한 선거를 치르는 ‘슈퍼 선거의 해’다. 약 40억 인구가 투표소로 향하는 역사적인 한 해가 절반을 넘어섰다.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를 향한 열기가 늘 뜨겁지만은 않다. 최근 세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각종 경고음이 쏟아지는 데다 ‘하나 마나 한 선거’ ‘뻔한 선거’에 대한 유권자들의 냉소도 점차 높아진 탓이다. 게다가 석연치 않은 선거를 통해 장기 집권을 정당화하는 지도자들도 늘고 있다. 스웨덴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의 스테판 린드버그 소장은 “2024년이 세계 민주주의의 성패를 가르는 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반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치러진 선거의 모습은 어땠을까. 네 가지 키워드를 통해 올해 상반기 마무리된 선거 결과를 되짚어본다.

경고 : 수십 년 ‘독주’ 멈춰 세운 민심

집권 세력의 부패와 무능을 향한 유권자의 ‘심판’은 선거의 핵심이다. 수십 년간 정권 교체가 없었던 나라에서도 돌아선 민심은 변화를 일으켰다.

30년간 집권당이 바뀌지 않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최초의 연립정부가 탄생했다. 남아공에서 ‘만년 여당’ 자리를 지켜 온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지난 5월 총선에서 처음 과반 득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총선이 치러진 지난 5월29일(현지시간) 수도 요하네스버그의 한 투표소 앞에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AP연합뉴스

‘민주화의 아버지’ 넬슨 만델라를 배출한 ANC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17세기 유럽에서 넘어온 백인들의 아파르트헤이트(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를 겪은 이 나라 시민들에게 ANC는 차별을 함께 무너뜨린 ‘동지’ 같은 존재였다. 만델라 이후로는 실정을 거듭하며 내리막길을 걸었는데도 유권자는 매번 ANC에 표를 몰아줬다.

이번 총선에선 달랐다. ANC는 40% 득표율도 겨우 넘기며 참패했다. 실업률이 32%를 넘어서고, 툭하면 정전이 벌어지는 데다 정치권의 부정부패가 반복되면서 유권자들은 등을 돌렸다. 남아공은 이제 ANC를 포함한 10개 정당이 함께 정부를 운영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아프리카뉴스는 “큰 사랑을 받으며 30년 동안 집권한 ANC는 치열한 반성의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인도 경제 성장을 이끈 ‘카리스마 지도자’ 나렌드라 모디 총리도 매서운 민심을 맛봤다. 그는 지난달 치러진 총선에서 3연임에 성공했지만, 그가 속한 인도국민당(BJP) 전체로 보면 출혈이 컸다. BJP는 모디 총리 집권 이후 처음으로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연합을 이룬 다른 소수 정당 의석까지 합해도 겨우 절반을 넘기면서, 대승을 자신했던 모디 총리는 체면을 구겼다.

인도 총선 개표가 시작된 지난달 4일(현지시간) 수도 뉴델리에 있는 인도국민당(BJP) 당사 앞에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AP연합뉴스

알자지라는 인도 유권자들이 “증오정치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짚었다. 모디 총리는 소수민족과 무슬림을 “침입자”로 규정해 탄압했고,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워 인구 80%를 차지하는 힌두교도 표심을 노렸다. 이런 ‘갈라치기’에 반감을 느낀 일부 유권자가 경고를 보냈다는 지적이다.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는 동안 극심해진 빈부격차도 ‘심판’의 배경으로 꼽힌다.

이는 ‘일당 독재’ 수준으로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온 모디 총리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 모디 3기는 소수 정당과 연정을 꾸렸고, 야권 의석도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남아시아 담당 연구원 치티지 바즈파이는 “모디 총리는 패배했지만, 인도 민주주의는 승리했다”고 평가했다.

반전 : 전문가도, 여론조사도 못 맞춘 이변

결말이 정해진 것처럼 보였던 선거에서도 이변은 벌어졌다. 변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장에 나선 유권자의 한표 한표가 모인 결과였다. 각종 여론조사와 전문가도 시민들의 절박함이 불러올 파장의 크기까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지난 5일 끝난 이란 대통령 선거가 대표적이다.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의 후임자를 뽑는 보궐선거였다. 전문가들은 이번에도 강경 보수파가 당선될 거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개혁 성향 후보 마수드 페제시키안이 당선됐다.

지난 6일(현지시간) 전날 치러진 대선 결선 투표에서 당선된 마수드 페지시키안 후보가 환호하는 지지자들 사이로 걸어가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슬람 신정일치 국가인 이란에서 권력 서열 1위는 최고지도자로, 대통령은 2위다.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긴 하지만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번 선거도 후보 6명 중 5명이 ‘하메네이 충성파’로 꼽히는 강경 보수파였고, 페제시키안은 유일한 개혁파 후보였다. 그는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바람잡이용’ 후보이자 ‘들러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서방 제재에 따른 극심한 경제난, 정부의 히잡 시위 탄압 등으로 누적된 유권자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미국 싱크탱크 국제정책센터 연구원 시나 투시는 “엄격하게 통제된 선거에서 페제시키안이 당선된 것은 이란 사회가 기존의 강경한 대외정책을 거부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CNBC방송에 말했다. 조지타운대학 중동학 교수 네이더 하셰미는 “개혁 성향 대통령은 기존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어떤 식으로든 제동을 걸 수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프랑스 총선에선 ‘막판 대역전’이 펼쳐졌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은 선거 기간 내내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달렸다. 지난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집권당을 누르고 압승했고, 총선 1차 투표에서도 1위에 오르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번에야말로 ‘극우 내각’ 또는 ‘극우 총리’가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이 쏟아졌지만, 마지막 관문인 2차 투표에서 반전이 벌어졌다.

승승장구하던 RN은 3위로 밀렸고, 좌파연합이 1위를 차지했다. 극우 집권을 막기 위해서라면 좌도, 우도 없다는 일념으로 유권자들이 뭉친 결과다. 외신들은 “충격적인 반전” “프랑스 선거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결과”라는 반응이다.

프랑스 총선 결선 투표가 치러진 7일(현지시간)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기뻐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RN과 그 지지자들은 이번 결과가 좌파연합과 범여권의 “부자연스러운 동맹”이 만든 결과라고 깎아내렸다. 1차 투표 이후 2, 3위 정당이 후보 단일화를 한 게 불공정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BBC방송은 극우 집권을 막기 위해 적극 투표에 나선 유권자가 만든 변화라고 짚으면서 “프랑스인들은 극우 집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보여줬다”고 전했다.

꼼수 : ‘답정너’ 선거로 독재 감추기?

선거가 반드시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일부 권력자들은 장기 집권의 명분을 쌓기 위해 선거를 이용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3월 대선에서 5선을 달성했다. 그는 앞서 4번째 임기를 수행하던 2020년 개헌을 통해 재출마의 길을 닦아놓았고, 이번 선거로 30년 집권을 굳히며 사실상 ‘종신 대통령’이 됐다. 스스로 종신 집권을 택한 푸틴 대통령은 ‘현대판 차르(황제)’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수많은 정적을 탄압하며 이미 권위주의로 접어든 푸틴 대통령은 왜 굳이 선거를 치를까. 러시아 외교관 출신인 보리스 본다레프는 알자지라 기고문에서 “푸틴은 자신이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통치자임을 보여주고 싶어한다”며 “선거에서 압승하면 우크라이나 전쟁도 명분이 생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3월17일(현지시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투표소에서 시민이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명한 투표함에 선거 용지를 넣고 있다. AP연합뉴스

올해 러시아는 역대 최고의 득표율과 투표율을 달성하겠다는 목표 아래 국가기구를 총동원하는 철저한 ‘관권선거’를 치렀다. 대선 사상 처음으로 3일간 선거를 했고, 29개 지역에서 전자투표를 실시했다. 국영기업 직원과 대학생, 공무원들에겐 불참 시 불이익이 있을 거라며 투표를 강요한 것으로 파악됐다. 결국 이번 선거는 역대 최고 투표율(77.4%), 역대 최고 득표율(87.2%)이라는 기록을 썼다.

중남미 국가 엘살바도르에선 ‘자칭 독재자’인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했다. 2019년 취임한 그는 초대형 감옥을 새로 짓고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증거가 없어도 갱단원으로 의심되면 일단 체포하는 강력한 갱단 소탕정책을 폈다.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10만 명당 살인율이 크게 줄면서 만연한 범죄에 지쳐있던 이 나라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지난 2월 엘살바도르 대선이 끝난 뒤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인권침해로 만든 성과라는 지적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부켈레 대통령이 헌법상 연임 제한을 무시하고 재선 도전을 선언하자 독재자가 됐다는 비판도 커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쿨한 독재자”라며 온갖 꼼수를 동원해 출마를 강행했다. 지난 2월 대선에서 부켈레 대통령은 83%에 이르는 득표율로 재선을 확정했다.

이에 엘살바도르가 민주주의 가치보다 권위주의적 해결책을 옹호하는 독재국가로 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휴먼라이츠워치의 미주 담당 연구원 타일러 마티아스는 높은 범죄율에 시달리는 중남미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원칙은 이미 힘을 잃었다”거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폭력의 해결책”이라고 믿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록 : 이웃들도 탐낼 이정표 세운 나라는?

선거를 통해 주변국이 주목할 만한 역사를 써 내려간 나라도 있었다.

지난달 멕시코 대선에서는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은 당선이 확정되자 “나 혼자 해낸 일이 아니다. 여성 영웅들과 우리 어머니, 딸, 손녀들과 함께 이뤄낸 것”이라고 말했다. 외신들도 일제히 “마초의 나라 멕시코에서 여성 대통령이 나왔다”며 놀라워했다.

지난달 3일(현지시간)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 당선인이 멕시코시티에서 승리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멕시코 일각에선 시큰둥한 반응도 나온다. 셰인바움이 여성 폭력 대응에 미온적이었던 전임 대통령의 최측근이고, 과거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에는 여성단체의 시위를 비난한 적이 있어서다.

하지만 이런 기록이 여성할당제를 도입한 결과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주목할만한 성과다. 멕시코는 1980~199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여성할당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고, 2019년 헌법에는 선출직 등 정부 고위직 여성 비율을 50%로 명시했다. 그 결과 2011년 25%에 불과했던 멕시코 여성 의원은 올해 48%까지 늘었고, 여성 지도자의 등장이 전혀 낯설지 않은 분위기가 됐다.

이웃 나라 미국도 이를 부러워하는 기색이다.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은 셰인바움의 당선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할당제의 역할을 조명했다. 미국은 1920년부터 여성 참정권을 보장해 멕시코보다 30년가량 앞섰지만, 여성 대통령이 나온 적은 없다.

세네갈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4번째로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뤘다. 나머지 서아프리카 국가들은 모두 민주주의 정착에 어려움 겪고 있어 세네갈이 ‘서아프리카 민주주의의 보루’로 떠올랐다.

선거 전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대선 일정을 4번이나 바꿨고, 유력 야권 인사들은 대거 수감돼 정적 탄압 논란도 일었다. 혼란 끝에 지난 3월 대선을 치른 결과 야당 소속 바시루 디오마예 파예 대통령이 당선됐다.

선출직 경험이 없는 세무조사관 출신인 파예 대통령은 “세네갈 국민이 과거와의 단절을 선택했다”며 “겸손하고 투명한 통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 역시 지난해 4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사법부를 모독했다는 혐의 등으로 구금됐지만 대선 열흘 전에 사면을 받고 석방됐다.

세네갈 인권단체 아프리카좀센터 설립자인 알리운 티네는 “세네갈은 서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군사 쿠데타를 한 번도 허용한 적이 없는 국가”라며 파예 대통령이 ‘민주주의 모범국’이라는 전통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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